여러가지 자기 개념들이 일관된 특징에 따라 구성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 서로 모순되는 특성이 한꺼번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기 개념들 간에 상호 모순되는 정도를
자기 복잡성(Self Complexity)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자기 개념들이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될 수록
자기 복잡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 모두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정신적으로는 더 건강하다.언뜻 보면 '어떻게 저렇게 이중적일 수 있지?'하고
의아해할 수 도 있지만, 이는 심리적으로 건강하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상황과 맥락에 맞춰서, 자기 모습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유연하다는 증거다. 자기 복잡성에 관해
지금까지 발표된 여러 연구 결과를 봐도, 자기 복잡성이 큰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도 잘 견디고, 위기가 닥쳐도 좋은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며,
우울증에 걸릴 위함도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는 주관적이다. 한 단어를 내뱉을 때
그 단어의 의미는 한 사람의 의식이 반영된 피표현물이다.
단어의 의미는 개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결정된 것이어서,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단어만으로 우리의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한 단어를 발성할 때, 그 단어의 체온과 느낌이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그 체온과 느낌을 맞춰보려 시도해 봐야 한다.
상대의 입 밖으로 발성된 한 단어를 이해해보기 위해
상대의 눈물을 다 거슬러 보아야 한다.
그만큼 타자의 언어는 너무 많은 확률과 변수과 시공간이 내포된
고차원적인 이해였다.
대게 우리는 어떤 말을 내뱉을 때, 그 말의 일차원적인 의미만을 떠올리고 만다.
언어의 이면까지는 고려해보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가 가까워지자 동시에 많은 확률과 변수와 서로 다른 시공간으로
또다시 멀어져 가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보았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Brave doesn't mean you're not scared, It means you go on even though you're scared. And you're doing that).” 가만히 지금까지 중 가장 용기있는 선택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기억이다. 당시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내게로 와 울면서 다른 학급 친구 누구누구로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다양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충격이 컸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물으니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괴롭힘을 당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또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면 이후에 고자질했다며 보복당할까봐 등의 이유로 조용히 있었던 것이었다.
일단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한 끝에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담임 교사가 학생들의 일기장을 매일 검사했으므로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니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 역시 그 아이들에게 찍혀서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온 아이들은 그 두려움이 더더욱 컸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간절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폭력을 고발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당시 담임교사가 별로 교사다운 사람이 아니었어서 괜히 고발해서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고발한 아이들이나 괴롭힌 아이들이나 똑같다는 식의 발언과 대응을 했다. 피해자 신변 보호 같은 것도 없었어서 누가 주도해서 고발했는지도 다 알려졌고 당연히 보복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들은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용기를 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위험이 존재하고 심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나의 선택이 옳다는 굳은 신념을 갖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 뻔히 힘들 것임이 예상되어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음을 배웠다. 매우 두려웠고 후폭풍도 컸지만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떳떳할 수 있었다. 고로 적어도 나는 후회도 없었다.
흔히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면 두려움이나 우유부단함 없이 과감한 일들을 척척 진행하는 수퍼맨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진짜 용기란 이토록 미약한 내가 나의 한계와 다가올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벌벌 떠는 손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클렘슨대의 심리학자 신시아 퓨리 등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용기에는 겁 없이 부딫히는 용맹함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용기있는 행동을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신체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필요한 행동을 하거나(신체적 용기),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거나(도덕적 용기), 혹은 완전 생소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거나(정신적 용기) 하는 다양한 경험들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나서 위의 용기있는 행동을 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질문들은 용기와 관련되어 보이는 다양한 덕목들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용기를 내는 과정에서 각종 위협이나 도전, 어려움, 고통에 의해 위축된 적이 있는지(용감함), 그 용기있는 행동을 했을 때 하기로 마음 먹은 행동을 끝까지 관철해냈는지(끈기), 당시 자신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진실된 마음으로 행동했는지(진실성), 사람들을 모아 조직하는 등 리더의 역할을 했는지(리더십),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지(친절),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는 않았는지(겸손), 자신의 용감한 행동으로 인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는지(희망), 그 일을 하며 충만한 마음과 살아있음을 느꼈는지(활력) 등에 대해 물었다.
연구자들은 총 24개의 서로 다른 덕목들에 대해 질문하고 많은 이들이 용기와 관련해서 공통적으로 경험했다고 말한 덕목 다섯개를 추려냈다. 희망, 친절, 끈기, 진실성, 용감함, 활력이 용기와 관련해 가장 자주 등장한 주요 덕목들이었다.
용기는 단순한 ‘겁 없음’보다 훨씬 큰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 끝에 언젠가는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는 희망,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를 신경 쓰고 보살피는 친절, 두렵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끈기, 남에게 멋져 보이기 위해서 등의 이유가 아닌 순수히 자신의 신념을 따라 행동하는 진실성, 위험과 협박에 괴로워할지언정 굴하지 않는 용감함, 힘들지만 올바른 행동을 하며 에너지가 넘치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활력의 여러 덕목들이 버무려진 상위 덕목이 용기의 진짜 정체라는 것이다.
하나도 두렵지 않고 하나도 갈팡질팡하지 않는 상태보다 매우 두렵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실수하며 후퇴하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씩 나아가는 상태가 훨씬 용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어쩌면 하루하루 고민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용기있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고려하면 살아가는 사람들 중 용감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금 같이 불확실한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것 또한 매우 용감한 행동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들이 모두 나의 무력함이 아닌 내 용기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
※참고자료
Pury, C. L., & Kowalski, R. M. (2007). Human strengths, courageous actions, and general and personal courage. The Journal of Positive Psychology, 2, 120-128.
인간의 정보처리에 대해 강의할 때면 시스템에 주요한 손상 있거나 적합하지 않은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는 경우,전체 시스템이 파국적으로 오작동 하기보다는 훈련된 네트워크 전체의 제한된 기능이 그럭저럭 유지되도록 하는 ‘우아한 쇠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파워포인트의 옛 버전 파일을 열게 될 때 (몇몇 기능은 작동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구 버전의 파일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처럼, 노화에 따른 뇌기능 저하가 이곳저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만 크게 보면 여전히 적절히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한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일하는 장면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장면에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하겠지요. 우리는 그때마다 우아한 쇠퇴, 우아한 실패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점차 늘려갈 회복탄력성에 기반해, 내가 지금 실패한 이 지점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성공할 때에는 아이처럼 굴어도 좋지만, 실패할 때만큼은 더 세련되고 우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뇌는 그렇게 작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당신에게 그럴 만한 기질적 자원은 갖춰져 있습니다. 이에, 다음의 세 가지 잔소리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먼저, 잦은 실패 경험으로 만성적인 무력감과 공허감을 겪는 시기에도, 당신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했고, 실패했고, 무쓸모한 사람>이라는 과거의 기억은 명확한 근거나 디테일 없이 무턱대고 당신을 규정해버립니다. 내가 정말 모든 사람에게 불쾌한 존재였을까, 내가 정말 살 이유가 없을까, 나는 그동안 계속 불행했을까, 모든 일이 실제로 실패했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면 그간 습관처럼 과잉 일반화하고 파국화 한 막연한 세계와 나의 실제 사건들 간 균열이 생깁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소확행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에 대비되는 뭔가 행복의 대단한 이상적인 상태가 있을 것만 같아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해 그것이 한편으로 걱정이지만, 원래 행복은 그런 거였습니다. 소소함. 홀로 소소하게 행복해왔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머릿속의 비좁은 방에 밀어 넣고는 나는 행복해서는 안돼, 하는 주문과 함께 그 방을 닫아버렸지만요.
뇌와 마음이 뭉뚱그려 만들어 낸 '나는 이 정도 일로 행복해서는 안 되는 사람' 따위의 프레임은 사실 어쩌면 그 실체가 없기에, 그 불행하고 어렴풋한 윤곽을 지속하기 위한 심리적 에너지는 계속 소모됩니다. 지금-여기에 머물러 순간적인 행복감을 알아차릴 능동적인 주의력과 활력은 그만큼 줄어들고요. 지나온 일들을 곱씹으며 나는 이제껏 그래왔듯 금세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어, 정말 큰 행운이 찾아올 때 '마음을 놓자' 생각하다 보면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스스로를 더 다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백일몽과 기억에 잠겨있는 순간,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은 무력감을 배우는 시간일 뿐입니다. 사회적 불안이 높은 사람들은 긍정적 피드백, 부정적 피드백을 다 받아도 긍정적 피드백을 유독 기억하는 일반대조군과 달리 굳이 부정적 피드백을 기억해 내 자기 개념에 꾸역꾸역 통합시킵니다. 그러는 거 아니에요.
어쩌라고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어쩌라고' 하면서 기억과 사고를 다잡으세요. 기분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표류하게 두지 말아요. '뭐라도 하자'며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의 머리 끄덩이라도 잡아서 일으키는 게 더 우아합니다. 또다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안감과 우울감이 당신을 들여다볼 때, 입 밖으로 소리 내어서라도 그 순간을 당신이 종결해야 합니다. '뭐라도 하자', 꾸준한 습관만이 당신의 길을 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기대해도 됩니다. 기대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실망이 너무 고통스럽겠지요.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면 최선이겠지만 우리는 보통 기대가 무너질 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에게 전시하기 위한 피상적인 실망이나,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책을 가리기 위한 기만적인 실망은, 당신의 성격구조를 차츰 왜곡시킵니다. 그냥 혼자서 멋쩍게 실망하고 지나갈 일에도 점차 나의 실패와 부족한 점을 굳이 변명하려 하거나 내가 누릴 수도 있었던 것을 자꾸 알리려 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실망을 하면 할수록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기대를 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세요. 당신의 기대는 한 번도 죄였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순수하게 기대했던 것뿐이고 당신의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아무 이유 없이 운 좋게 성취될 때도 있고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기대는 죄가 없고, 당신도 죄가 없습니다. 그냥 상황이 그랬습니다. 당신에게 불행감을 가져오는 사건들은 많은 경우 당신의 노력과 기대와는 상관없이 운과 상황에 의해 좌우됩니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한다고 했습니다. 수백 번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일으켜가며 어떻게든 끝까지 하려 했습니다. 당신이 모두 알지요.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주인공이 나였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 따위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억지로 만들어 낸 가치 아니어도, 당신과 나는 이대로 충분합니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기대에서 나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달걀샌드위치가 형편없었대도,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덮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학점이 개판이었대도, 내일 보기로 한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 번을 실망한대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존성을 비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저 유연히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나의 의존성과 취약성, 나의 감정적 약점과 개인적 결함들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건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일리가요. 이미 배웠잖아요. 대부분의 사람은 원래 의존적이며 사회적인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차 나의 이 조각들을 불편감 없이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미 독립성이 높다면, 이는 많은 경우 운에 기반했습니다(풍부한 문화적 환경, 높은 사회경제적 상태와 같이 독립성을 학습할 기회가 더 많았지요).
나의 부적절감이나 의존성에 홀로 수치스러워 날을 세워 사람을 밀어내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당신 곁에 다정히 남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천천히 독립적인 삶이 무엇인지 알아나가며 성장할 것이고요.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대로, 만나지 않으면 또 그런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날 세우지 않아도 돼요. 노력하되, 애쓰지 말아요. 인지하되, 의식하지 말아요. 자신의 타고 태어난 의존성을 편안하게 인식하고 그 종류와 방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의존성 대비) 독립성의 지분을 차츰 높일 수 있는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을 고안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듯 (일희일비는 고사하고) 일비일비 할 필요는 없음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과 신념들에서 부드럽게 물러서고 당신의 삶을 그렇게까지 싸잡아서 0 혹은 1 단 두 가지의 결과로 규정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에는 할 수 있는 만큼만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을 만큼만) 전력을 다하고 그 이후로는 운명의 시간으로 떠나보내기를 바랍니다.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자신의 등뼈 외에는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홀로 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에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는 중심 잡힌
마음이야말로 본래의 자기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행복하라> 법정 스님
수천 년 동안 결혼은 두 개인의 결합이라기 보다는 경제적 생존을 보장하고
사회 화합을 촉진하는 두 가족 간의 전략적 제휴에 가까웠다. 결혼은 실용적 합의였다.
남편과 아내는 공존하며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삶을 꿈꿨다.
사람들은 안정감과 소속감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얻는 대가로 부부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사랑은 결혼이라는 중대한 제도를 떠받치기엔 너무 얄팍한 감정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열정은 늘 피어오르기 마련이었지만 부부 관계와는 상관없이 발생했다.
역사가 스테파니 쿤츠Stephanie Coontz는 결혼이 주로 경제 연합체였던 시기에
때로는 불륜이 사랑을 위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쿤츠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회에는 성욕과 열정, 파트너에 대한 이상화가 합쳐진 낭만적 사랑 개념이 있다.
하지만 대개 이런 것들은 결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는데,
결혼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이익을 따지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진정으로 순수한 사랑은 결혼 밖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부부 간의 신의와 독점적 관계는 최근까지도 사랑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2가지는 유산과 혈통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어느 아이가 내 애고 내가 죽으면
누구에게 소를(또는 염소나 낙타를) 물려줄지를 확실히 알기 위해 여성에게 강요된 가부장제의 기둥이었다.
아이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가 금발인데 가족 중에는 금발인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아이 아버지는 의심하게 됐다.
“널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역사상 이 두 말은 함께 쓰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대두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사회가 급변하면서
결혼의 의미가 재정립되었다. 결혼은 경제 단위에서 동반자 관계로 서서히 진화했다.
이제 결혼은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 사랑과 애정을 토대로 한 두 개인 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되었다.
좋건 나쁘건 이들은 이미 결혼식을 올렸고 오직 죽음만이 둘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당시에는 죽음이 오늘날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는 것이다.
뉴스는 (자율신경계의 일부인) 교감신경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심리를 뒤흔드는 자극적인 기사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를 촉진한다. 많든 적든 코르티솔이 혈류를 따라 체내에 흐르면 면역 체계가 약해지고 성장 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된다. 뉴스를 소비하면 당신의 몸은 스트레스 상태에 놓인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세포, 머리카락, 뼈 등의) 성장을 방해하며 소화 장애를 유발한다. 여기에 더해 감염에 대한 저항성을 떨어뜨리며, 신경과민을 초래하기도 한다. 뉴스 소비의 또 다른 잠정적 부작용으로 불안, 공격성, 터널 시야, 감정의 둔감화 등이 있다. 요약하면 우리는 뉴스를 소비하며 자신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얀테의 법칙( - 法則, 덴마크어: Janteloven, 스웨덴어: Jantelagen, 영어: Law of Jante)은 노르딕 국가에 흔히 알려진 일종의 행동 지침으로 평범함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나 개인적으로 야심을 품는 행동을 부적절하게 묘사한다. 덴마크계 노르웨이인 작가인 악셀 산데모세(Aksel Sandemose)가 풍자소설 '도망자'(A Fugitive Crosses His Tracks, En flyktning krysser sitt spor, 1933)에서 묘사한 얀테의 법칙에서 유래했지만 실제로는 좀 더 오래된 것이다.[1] 그의 소설은 허구의 작은 덴마크 마을 얀테를 묘사하는데 이곳은 자신의 고향인 뉘쾨빙 모르스(Nykøbing Mors)를 모델로 했다. 뉘쾨빙은 마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개인주의와 사적인 성공에 몰두하기보다는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태도,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을 일제히 비판하는 태도, 그리고 양쪽을 나타내는 사회학적 용어이다. 북유럽 국가 사람들은 일상에서 쓸 정도로 널리 알려진 표현이다.
산데모세는 10가지 규칙을 언급했지만 사실 한 가지 의미를 다양하게 묘사한 것이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더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산데모세가 쓴 얀테의 법칙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들을 비웃지 마라.
누군가 당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이 불문율을 깨려는 자는 마을 공동체의 조화를 깨는 적으로 간주된다. 소설에는 11번째 규칙인 '얀테의 형법'이 추가되어 있다.
우리가 당신을 꽤 알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겠지?
얀테의 형법은 어디에도 적용될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죄를 씌울 수 있었다.
산데모세는 얀테라는 마을의 노동계급에 대해 썼지만 사실 어느 인간 사회도 얀테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말했다.
산데모세가 이 법칙을 창작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북유럽인들의 정신에 수 세기 동안 박혀 있는 것들을 명시한 것이다.
얀테의 법칙은 북유럽 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점차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언급되었다.
북유럽 사회에서 얀테의 법칙은 공통되며,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생긴 차를 타며 집집마다 비슷한 물건들을 놓고 산다.
얀테의 법칙은 주로 지방에서 강하게 언급되지만 그렇다고 도시 사람들에게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얀테의 법칙은 일종의 사회적 관습을 키워 주기 위해 학교에서 교육하기도 한다며 비판 되지만 또 북유럽 국가들의 균질하게 높은 평등한 삶의 방식에 대한
만족감으로 이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얀테의 법칙은 노르딕 사회의 높은 자살율과도 이어진다는 기사가 있다. 더 이상 얀테의 법칙이 북유럽 사회를 규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부정 되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여전히 있다.
휘게(덴마크어·노르웨이어: Hygge)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명사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율레휘게'(Julehygge)는 "크리스마스에서 오는 행복"을 뜻한다.
혹은 휘게라는 단어 자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삶의 여유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휘게란 덴마크어로
'위안 포옹 배려 웰빙 분위기’ 의 뜻에서 유래되었고
이런 것들이 행복한 삶을 만드는 요소들과 일치하고 있다.
1. 분위기를 만든다 (조명을은은하게)
2. 지금 이 순간을 누린다
3. 달콤한 휴식을 가진다 (커피,초콜릿,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4. 모두를 평등하게 생각한다 (‘나’보다는 ‘우리’)
5. 감사하고 만끽한다
6. 분위기를 조화롭게 한다
7. 긴장을 풀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8. 감정 표현은 쉰다
9. 화목한 마음으로 추억을 되새긴다
10. 편안하고 포근한 장소를 정한다
코멘트
하지만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훌륭한 책 한 권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돈이 있는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동급생> 프레드 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