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보다도, 귀족적인 분위기보다도, 은근슬쩍 젠체하는 미소보다도, 그의 우아함이었다.
2024.03.01.
그런데 이제 여기에, 내게서 단지 몇십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가 홀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 걸출한 슈바벤 집안의 구성원이 나와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앉아 있었다.
2024.03.01.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상 같은 그 아이의 당당한 얼굴을 세세히 눈여겨보고 있던 나에 비한다면, 실로 그 어떤 연인도 트로이의 헬레네를 더 열심히 주시하거나 또는 자신의 열등함을 더 확실히 알아차릴 수는 없었을 터였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그와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2024.03.01.
온갖 영광에 감싸인 그가 어떻게 내 수줍음을, 내 의심스러운 자존심과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콘라딘 폰 호엔펠스가, 자신감과 세련된 우아함을 그렇게도 원하는 나, 한스 슈바르츠와 공통으로 가진 것이 무엇이었을까?
2024.03.01.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있는 소년들은 때때로 천진무구함을 심신의 빛나는 순결함, 완전하고 이타적인 헌신을 향한 열정적인 충동과 결부시킨다. 그 단계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강렬함과 독특함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2024.03.01.
문제는 어떻게 그를 내게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귀족 집안 아이들과 캐비어 패거리를 점잖지만 단호하게 퇴짜 놓아 버린 그에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그의 선천적인 자부심과 후천적인 오만함이라는 전통의 장벽 뒤에 참호를 파고 그를 공략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그는 혼자 있는 것에, 단지 그래야 할 때만 어울리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뚝 떨어져 있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2024.03.01.
며칠 뒤 나는 그리스 시대의 동전들을 몇 개 가지고 학교로 갔다. 열두 살 때부터 동전을 수집해 오고 있던 터였으니까
2024.03.01.
그 대목에서 선생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겼고, 10시에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콘라딘은 흥미를 잃어버린 듯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그렇더라도 나는 행복했다. 그가 내게 말을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나는 그와의 대화가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게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2024.03.01.
나는 그날 콘라딘이 내게 무슨 말을 했고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가 젊은 두 연인처럼 한 시간쯤 길을 따라 오르내렸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서로를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2024.03.01.
나중에 흥분이 가라앉자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두려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가 나를 이미 잊어버렸거나 자기가 굽히고 든 것을 후회한다면? 그 일이 내가 그를 얼마나 친구로 삼고 싶어 하는지를 그에게 알려 주기만 한 실수였다면? 내가 좀 더 조심스럽고 좀 더 자제해야 하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그가 자기 부모에게 내 이야기를 하자 그들이 유대인 아이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다짐을 두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나는 혼자 속을 끓이다가 마침내는 불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2024.03.01.
정치는 어른인 사람들의 관심사였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삶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지 배우는 것이었고 이것은 삶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과연 있기나 한지, 또 이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우주에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지 알아내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히틀러니 무솔리니니 하는 덧없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정하고도 영원한 의의라는 문제가 있었다.
2024.03.01.
수많은 군인들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 ─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24.03.01.
그는 내게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 악에 대해서, 추악함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듯이, 우리가 선의 진가를 알려면 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를 납득시키지는 못했고 우리의 대화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
2024.03.01.
하지만 나는 우리의 순진함, 우리가 함께했던 삶의 한 단면으로 언급했을 뿐인 그런 순진함의 미덕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와 슬픔, 기쁨, 그리고 문제점들을 열거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 상태를 다시 포착해서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2024.03.01.
네카어나 라인산 와인을 마시고 송아지고기와 감자 샐러드, 얇게 저며서 튀긴 살코기, 보덴 호수에서 잡은 연어, 검은 숲에서 잡은 송어, 자우어크라우트[15]를 곁들인 뜨거운 간과 선지, 월귤을 곁들인 노루 등심, 베아르네즈 소스로 요리한 투르느도,[16] 그리고 무엇인지 아무도 모를 그 밖의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
2024.03.01.
이제는 내가 왜 그를 몰래 들이려고 했는지 알기가 좀 더 쉽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가 내게만, 오로지 내게만 속한다고 느껴서 그를 다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 그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해진다 ─ 우리 부모가 별로 〈당당하지 못하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부모를 부끄러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언제나 그들을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런데 이제 콘라딘 때문에 내가 재수 없는 어린 속물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름이 쫙 끼쳤다.
2024.03.01.
그가 거대한 검은 문을 가볍게 두드리면 문이 조용히 뒤로 미끄러지듯 열렸고 콘라딘은, 마치 영원히 사라지기라도 하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때때로 나는 쇠창살 사이로 건너편을 응시하면서, 〈열려라 참깨〉처럼 대문이 열리고 그가 다시 나타나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하기를 기대하면서 1~2분쯤을 기다리곤 했다.
2024.03.01.
하지만 나를 콘라딘에게서 갈라놓는 장벽은 영원히 붙박인 것 같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그처럼 조심스럽고 그처럼 사려 깊고 언제나, 설령 내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내 성급한 행동과 공격성을 용인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그가 어떻게 나를 초대하는 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자존심이 강한 탓으로 그에게 물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점점 더 걱정스러워지고 의심이 들고 호엔펠스 가의 요새에 침투해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2024.03.01.
「제발 나를 하느님이 만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대로 받아들여 줘. 나는 이 모든 걸 너한테 숨기려고 했지만 너를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았어야 했고 이 일에 대해서 너한테 미리 얘기할 용기를 냈어야 했어. 하지만 나는 겁쟁이야. 그래서 단지 네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었던 거고. 하지만 그게 온전히 다 내 탓만은 아니야. 너는 누구에게나 네 이상적인 우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너무 심하게 세워! 너는 단순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해. 내 소중한 한스,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애써 봐. 그리고 우리 계속 친구이기로 해.」
2024.03.01.
나는 그에게 손을 내주었지만 차마 그의 눈을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우리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둘 다 울기 시작할 것 같아서였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겨우 열여섯 살짜리 아이들이었으니까. 천천히 콘라딘이 철 대문을, 그의 세상으로부터 나를 갈라놓는 문을 닫았다. 앞으로 내가 그 경계선을 다시는 넘지 못할 것이고 호엔펠스 가문의 저택은 영원히 내게 닫히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고 그도 알았다.
2024.03.01.
콘라딘이 돌아서서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같이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나의 손이 풀어 달라고 울부짖는 죄수의 손처럼 쇠창살을 꽉 그러쥐었다. 부리와 발톱이 낫처럼 생긴 독수리들이 호엔펠스 가문의 방패 문장을 높이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2024.03.01.
그도 우리 어머니를 보러 왔지만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었다. 상황이 다시는 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우정과 어린 시절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
2024.03.01.
나는 계층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보통 생겨나는 적대감 이상의 것에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나에 대해서 강한 악감정은 품지 않는 것 같았고 나는 어떤 종교적이거나 종족적인 편협에 부딪히지도 않았었다.
2024.03.01.
〈유대인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대인들.〉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그것뿐이었지만 그 말이 합창처럼 되뇌어졌고 그 말이 입 밖에 나올 때의 격렬함을 잘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2024.03.01.
저녁이 다가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나는 모두들 갈 때까지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때에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내가 학교를 나섰을 때 길은 겨울날의 백사장처럼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다.
2024.03.01.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길고 잔인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를 인도하던 불빛들도 이미 가물가물 흐릿해져 있었다.
2024.03.01.
나는 네게 한동안은 ─ 아마도 1년이나 2년쯤은 ─ 이 새로운 독일에 너를 위한 자리가 없을 거라는 말을 하는 게 너무도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나중에 돌아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찾아볼 수가 없어.
2024.03.01.
총통이 유대적인 요소들 중에서 좋은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완벽하게 가려낼 능력과 의지를 지녔다고 믿어.
2024.03.01.
근원 가까이에 깃들인 것은 그곳을 떠나길 꺼려하는 법이니[25]
2024.03.01.
하지만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훌륭한 책 한 권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돈이 있는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2024.03.01.
〈죽음은 최후의 어둠이 오기 전에 결국 모든 것이 똑같이 덧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자신감을 갉아먹는다〉라는 글을 내가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덧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적들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한 순간들, 해가 지는 광경이나 달이 떠오르는 모습, 또는 산꼭대기들에 쌓인 눈을 지켜보는 순간들도 있다. 또 다른 보상도 있다
2024.03.01.
그들이 떠난 이래로 나는 가능한 한 독일인과의 만남을 피했고 독일어로 되어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횔덜린의 시집마저도, 펼쳐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잊으려고 애를 써왔다.
2024.03.01.
「그러면 호엔펠스 성은요?」 「그것도 돌무더기.」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요?」 그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대답했다.
2024.03.01.
그리고 다 읽어 내렸을 때 나는 우리 반이었던 마흔여섯 명 중 스물여섯 명이 천년제국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03.01.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내가 잊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던 무엇인가를 긁어 올리고 있었다.
2024.03.01.
나는 세세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무거운 책상과 걸상이 있던 교실, 마흔 개의 축축한 겨울 코트에서 풍겨 나는 시큼한 곰팡내, 눈 녹은 물이 고인 웅덩이들, 전에 한때, 그러니까 혁명 이전에 빌헬름 황제와 뷔르템베르크 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던 자리임을 보여 주는 회색 벽에 남은 누르스름한 선들. 지금도 나는 눈을 감으면 내 급우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2024.03.01.
작은 구멍 하나가 둑 전체를 무너뜨리듯이, 가랑비에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젖듯이, 작지만 강한 독소를 지닌 상처가 누적되면 결국 우리는 무너지게 됩니다.
2023.10.30.
감지하기도 드러내기도 어려운 작은 상처들은 우리의 정서적 내면 깊숙이 쌓여서 신용카드 이자처럼 복리로 적립된다.
2023.10.30.
AAA 접근법 •1단계–인식(Awareness): 당신이 지닌 독특한 스몰 트라우마를 발견하고, 그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삶을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 파악한다. •2단계–수용(Acceptance): 이 솔루션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많은 사람이 슬쩍 넘어가려는 단계다. 그러나 수용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스몰 트라우마는 지금의 삶에 계속해서 과도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3단계–행동(Action): 수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하는 삶을 만들어나가려면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2023.10.30.
그와 동시에 우리의 활력과 열정, 잠재력을 고갈시키는 것 역시 작고 일상적인 일이다. 자신의 스몰 트라우마를 인식하고 이해하면 강력한 심리적 면역력을 구축할 수 있고, 미래의 빅 트라우마가 끼칠 파괴적인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2023.11.02.
이 책에는 내가 20년이 넘는 연구와 임상 경험을 거쳐 발견한 사실들이 담겨 있다.
2023.11.02.
여기서 ‘주제(them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스몰 트라우마가 그 자체로 의학적 상태는 아니지만 일정한 패턴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23.11.02.
곧바로 행동 단계로 돌진하는 바람에 엄청난 좌절을 경험하는 내담자를 자주 목격했다. 그렇게 하면 상처를 입었을 때 환부를 깨끗이 씻지도 않고 바로 반창고를 붙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2023.11.02.
상처가 깊을수록, 스몰 트라우마가 많고 상태가 극심할수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노력할 가치가 있다. 당신은 ‘소중하니까’.
2023.11.02.
그러나 이런 작은 정신적 상처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해결되지 못해 누적된 스몰 트라우마가 우리의 삶을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는지 이해하고 나면, 이를 활용한 AAA 접근법을 통해 정신적으로 굳건한 면역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2023.11.02.
이 장에서 살펴볼 내용 - 트라우마가 신체 및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 -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의 차이점
2023.11.02.
- 스몰 트라우마의 다양한 원인 - 심리적 면역체계 - 스몰 트라우마를 심리적 항체로 활용하는 법
2023.11.02.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는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본다
2023.11.02.
가장 최신 버전인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DSM-5)에는 개별 진단이 가능한 157가지 정신 및
2023.11.02.
행동 장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1952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에 비해 50퍼센트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대의 인간들이 옛날보다 더 많은 정신장애에 시달린다는 뜻일까?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경험과 고통을 인식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상적이고 흔한 사건들마저도 기능이나 정서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2023.11.02.
‘스몰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 Reprocessing, EMDR)의 창시자로 유명한 심리학자 프랜신 샤피로(Francine Shapiro) 박사의 연구였다.
2023.11.02.
샤피로 박사는 트라우마의 개념을 정서적 방치나 무관심, 사회적 망신, 가족 관계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자주 겪는 경험까지 확대했으나 이는 빅 트라우마나 주요 생애사건의 심각성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샤피로 박사는 연구 및 임상 경험을 통해 이런 작은 위협들이 장기적으로 정서적 및 신체적인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여겼다.(때로는 이런 유형의 트라우마를 ‘리틀 트라우마’라고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스몰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2023.11.02.
심각한 트라우마가 증상을 더 많이 초래한다, 환자의 삶에 더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등등의 결론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상은 반대였다. IBS를 유발하는 것은 이제껏 심리학자들이 건강을 악화시킨다고 배웠던 빅 트라우마나 주요 생애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트라우마였다
2023.11.02.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 심리학 연구도 언제나 가장 명백하고 심각한 사례부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그 가치만큼은 조금도 덜하지 않은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2023.11.02.
우리의 인생이 보트라고 하자. 당신은 벌써 수년째 이 보트를 타고 항해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트는 암초에 부딪치고 심한 폭풍에 마모되며, 물고기들이 선체 바닥을 갉아 먹기도 한다. 보트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수리할 도구도 갖추고 있다면 이런 작은 손상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항해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특히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면 때로는 물이 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이면―이유도 없이 배의 속도가 줄었다거나―대개 이미 곤경에 처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게 바로 스몰 트라우마다.
2023.11.02.
스몰 트라우마는 주요 생애사건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정 단계에서 발생하며 처음 심리적 충격을 받은 뒤로 경미한 수준의 트라우마가 오랜 기간에 걸쳐 강화될 때 생성된다. 이러한 강화 작용은 결국 특정한 패턴을 형성하는데 정신 건강 패턴일 수도 있고 혹은 그 결과로 인한 행동 패턴일 수도 있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스몰 트라우마 주제는 바로 이와 같은 패턴들로,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2023.11.02.
많은 사람이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로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지니고 있다.
2023.11.02.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은 수없이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한다. 양육자가 무심했다거나 가혹했다거나 양육 방식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독특한 기질이나 성격과 맞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몰 트라우마를 이해해야 한다. 딱히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경험과 맥락,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이것이 AAA 접근법의 첫 번째 단계다) 우리는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왠지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며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은 ‘괜찮지 않은’ 상태에 머물게 된다.
2023.11.02.
“당신에게 꽤 중요한 영향을 미쳤거나 당신을 변하게 했지만, 굳이 언급할 만큼 중요하거나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경험이나 사건이 있나요?”
2023.11.02.
나는 상담을 시작할 때 모든 내담자에게 이렇게 묻는데 그러면 거의 언제나 트라우마라 할 만한 것이 드러난다.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부정적 사건은 긍정적 사건보다 마음속 깊이에 훨씬 더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개’ 여기서 듣는 이야기는 어떤 형태로든 스몰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2023.11.02.
우리는 이 대답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모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조합되어, 그 결과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때로는 순전히 해롭기만 한 감정과 행동(모의 경우에는 과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배우는 시작점이다.
2023.11.02.
우리가 여기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스몰 트라우마의 기본 원칙 중 하나를 배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종류의 트라우마는 ‘누적’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빅 트라우마는 일반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쉽게 식별되는 사건(또는 학대처럼 일련의 사건)이며, 몸과 마음에 유해한 영향을 끼친다는 데 누구나 즉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스몰 트라우마는 그보다 훨씬 작은 사건들의 조합이고 특정한 맥락 속에 흩어져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해져 쌓인다.
2023.11.02.
이런 전형적인 행동은 스몰 트라우마의 뚜렷한 특징이며, 자신이 배려나 연민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또한 AAA 접근법의 인식 단계에서 수용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데, 그 특성상 스몰 트라우마는 빅 트라우마만큼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2023.11.02.
이 사례는 하나의 특정 사건에서 시작해 되짚어 올라가는 방식이 왜 유용한지 알려준다. 하지만 더 많은 스몰 트라우마를 찾는 것도 그만큼 유용하다.
2023.11.02.
인간관계의 스몰 트라우마
2023.11.02.
미리 알려주자면 이 책은 진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부한 이야기가 진부한 데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보편적 현상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알아보기도 쉽다. 스몰 트라우마가 미래의 인간관계와 성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8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지금은 일단 인간관계에서의 스몰 트라우마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2023.11.02.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도 스몰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친밀한 관계는 스스로를 활짝 열어 취약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2023.11.02.
이것이 바로 스몰 트라우마의 특징이다. 마음속 깊이 새겨져 아물지 않는 작은 상처가 10년 전에 잠깐 스쳐 지나간 짧은 불장난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덜 중요한’ 스몰 트라우마 같은 건 없다. 요는 그 사건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그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아직도 유효한지다. 아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감정뿐이다. 당신은 당신이고, 당신이 지금껏 달고 살아온 상흔들은 당신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며(적어도 어느 정도는) 일시적 또는 지속적인 감정 상태를 조종한다
2023.11.02.
특히 여성 간의 우정은 개인의 정서적 건강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우 큰 영향
2023.11.02.
영향을 끼친다. 이는 생존 반응에 기반한 남성과 여성의 진화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2023.11.02.
‘투쟁 또는 도피’ 스트레스 반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포식자와 마주쳤을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거나 바람 같은 속도로 도망쳐야 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몸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복잡한 생리적 과정을 거친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근육에 더 많은 혈액을 공급하고 에너지 수준을 급속히 높이기 위해 포도당을 방출한다. 동공은 위험을 더 잘 포착하기 위해 확장된다. 하지만 이것이 스트레스 반응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2023.11.02.
의학 및 심리학 분야의 초창기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인간의 스트레스 대처법에 관한 연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연구가 다른 집단에도 이 중요한 과정을 적용하려고 시도했고, 그 결과 여성들도 격렬한 투쟁-도피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덜 공격적인 ‘보살핌과 어울림(tend and befriend)’ 패턴을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023.11.02.
만일 여성이 집단에서 사회적 위치가 높은 여성을 공격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집단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도 있었다. 원시시대에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여성 자신과 여성의 직계가족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여성은 대체로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배우자나 가족 간의 불화에 남성보다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2023.11.02.
끊임없이 숨은 의도를 짐작하고 주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예를 들어, 평화로운 분위기 지키기)하다 보면 여성들은 문화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을 숨기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진정한 자아를 억압하게 된다
2023.11.02.
물론 이건 아주 단순화한 결론이고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삼으면 몇몇 복잡한 현상이 꽤 이치에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스몰 트라우마 위에 층위를 쌓아 보다 섬세한 그림을 구성하다 보면 왜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기분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다.
2023.11.02.
여성과 남성 모두 뼛속부터 사회적 존재이고, 집단에 소속되고 주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과 공기, 음식과 안전만큼이나 생존에 필수적이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성인이 되어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우리의 정체성과 안정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기반한다.
2023.11.02.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듣는 사람이 없는데 소리가 난다고 할 수 있는지 묻는 사고실험이 있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없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2023.11.02.
영혼을 파괴하는 이런 변화는 기존에는 주로 ‘억지로 하는 일’에서만 나타나던, 일터에서의 스몰 트라우마라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2023.11.02.
그렇다면 운 좋게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까? 음, 글쎄. 커리어에는 더 많은 훈련과 승진, 더 높은 직급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대개 더 많은 돈을 위한 발전 기회가 수반되기 때문에 경력 사다리라는 미끌미끌한 기둥이 특정한 스몰 트라우마 반응을 유발하게 된다. 바로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다.
2023.11.02.
끝없는 평가(비판)와 치열한 경쟁, 그리고 집단에서의 서열 관계가 겹치고 쌓이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언젠가는 남들도 자신의 부족함을 눈치챌 것이라는 조마조마한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2023.11.02.
비밀을 하나 알려주자면 실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스몰 트라우마는 대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온다. 대부분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가면증후군과 스몰 트라우마 문제는 상당히 만연해 있어 나는 이 주제에 아예 6장을 통째로 할애했다
2023.11.02.
하는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용납 가능한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완전한 규칙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범람하는 허위정보와 개인정보 보안 문제, 온라인 괴롭힘과 악플, 스토킹, 리벤지 포르노와 캔슬 컬처(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배척하는 현상. 특히 유명이나 공적 지위에 있는 인사가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SNS 등에서 팔로우를 취소하고 거부하는 행동 방식을 말한다.—옮긴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스몰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고 말았다.
2023.11.02.
그렇다. 바로 소셜 미디어 얘기다. 다만 SNS 플랫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는 비교 수단으로 삼는 우리 인류의 이상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는 사진이 수정됐거나 필터를 이용했거나 보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조차도 그 ‘완벽한’ 이미지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자아존중감에 큰 타격을 받는다.
2023.11.02.
당시 과학자들은 새끼 포유류가 먹이를 제공하는 양육자에게 일차적으로 애착을 발달시킨다고 믿었지만, 놀랍게도 실험 결과는 후자였다. 할로와 동료 연구진은 영유아가 생존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접촉 위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숭이도 인간도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려면 만지고 매달릴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줌 통화로는 결코 정서적 결핍을 충족시킬 수 없는 이유다.
2023.11.02.
다른 사람이 빅 트라우마 또는 주요 생애사건을 경험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발생하는 스몰 트라우마도 있다. 이를 흔히 대리 트라우마 또는 대리외상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처럼 장기간에 걸쳐 오래 지속된 사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뉴스 헤드라인을 읽어대는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암울함을 뜻하는 doom과 스크롤을 뜻하는 scrolling의 합성어로 스마트폰으로 암울한 뉴스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옮긴이)도 미디어가 연중무휴로 뉴스를 쏟아내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대리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다.
2023.11.02.
또 우리는 지금 끝이 보이지 않는 정치적·문화적·사회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는 영구위기(permacrisis, ‘영구적’을 뜻하는 permanent와 위기를 뜻하는 crisis의 합성어.―옮긴이) 시대에 와 있다. 이것이 사실이든 그저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인식할 따름이든, 많은 사람이 우리가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로 이어질 영구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끼고 있으므로 이는 학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탓에 많은 사람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는 보고가(이른바 환경불안증) 늘어나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절망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상하다 보면 동기부여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이는 환경과 관련된 행동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악영향을 주는 환경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23.11.02.
당신을 괴롭힌 스몰 트라우마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내가 ‘심리적 면역체계’라고 부르는 것을 신체적 면역체계에 비교해 설명해보겠다.
2023.11.02.
사람의 신체적 면역체계는 태어날 때부터 있는 선천성 면역과 성장하면서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적응성 면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11.02.
선천성 면역은 유전자에 암호화되어 담겨 있지만 자연계의 병원체에 반응하기 때문에 환경에 맞춰 미세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하고, 타인과 교류해 감기에 걸리고 벌레에 물리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병원체는 면역 반응을 촉발시켜 향후 더 큰 위험을 물리칠 항체를 만들어낸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면역체계는 외부 공격에 대처하며 적응해나간다.
2023.11.02.
심리적 면역체계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스트레스 반응이라는 고정된 형태의 생존 본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조잡한 도구라 우리는 자라면서 다양한 대응기제를 습득해 삶의 시련과 고난을 극복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심리적 면역체계가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경험을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렸을 적에 “안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고 울음을 터트리거나 떼를 쓸 테지만, 안정적이고 애정 넘치는 환경에서 이러한 경험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이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안정적인 심리적 경계를 형성하고 존중하며, 공격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된다. ‘감정 항체’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아이는 원하는 것을 즉시 얻지 못하는데, 이때 마음의 안전망을 형성하는 심리적 병원체는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환경에 수용되어 있고, 바로 그것이 해로운 스몰 트라우마와 평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스몰 트라우마의 차이를 만든다
2023.11.02.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약간’의 고난이나 도전도 감정적 백신으로 작용해 미래에 더 중요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대응 전략을 제공한다. 이것이 스몰 트라우마 분석이 중요한 이유다.
2023.11.02.
일반 백신이 완전한 감염을 일으키기보다 소량의 바이러스를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처럼, 감정 백신도 아주 작거나 중간 정도의 규모일 때 적절하기 때문이다.
2023.11.02.
우리는 종종 우리의 잘못이나 상대방의 거절을 ‘실패’로 인식하고 자책하지만, 이렇게 작고 괴로운 경험이 심리적 면역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라고 이해하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버릴 수 있다. 부정적 사건을 감정 백신으로 활용해서 힘든 경험을 통해 긍정적 깨달음을 얻고 감정 항체를 자극하는 것이다.
2023.11.02.
어떤 이들은 이렇게 괴로운 일을 겪고 회복하는 것을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하고 ‘회복탄력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다. 강하고 탄력성 있는 심리적 면역체계를 구축하는 것, 즉 앞으로 살면서 직면할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한 맞춤형 대응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23.11.02.
잃거나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거나 직장에서 해고될 수도 있다. 이런 폭풍우를 헤쳐나가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스몰 트라우마를 파악해보자. 그러면 그 계기와 촉발 요인을 경계함으로써 위협을 감정적 항체로 바꿀 수 있다.
2023.11.02.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수용과 체념의 차이를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된다. 많은 사람이 AAA의 두 번째 단계인 ‘수용’을 수동적인 희생자의 마음가짐, 또는 삶의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수용이 아니다. 수용이란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우여곡절과 좋고 나쁜 것을 기꺼이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험난한 길에 적응해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이 여정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수용은 절대로 체념과 같지 않다. 이 둘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2023.11.02.
삶의 다양한 경험을 수용하면, 스몰 트라우마를 능동적으로 활용해 미래의 우리를 보호해줄 강력하고 튼튼한 심리적 면역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2023.11.02.
스몰 트라우마의 핵심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에게 꽤 중요한 영향을 미쳤거나 당신을 변하게 했지만, 굳이 언급할 만큼 중요하거나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경험이나 사건이 있는가?’
2023.11.02.
생각나는 것을 종이에 기록해두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감정 표현 글쓰기와 일기가 치료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다양한 연구 조사를 통해 입증된 바 있기에, 매 장이 끝날 때마다 나는 글쓰기를 장려할 것이다
2023.11.02.
두 골짜기에서 Aus zwei Tälern 종이 울린다. 멀리 골짜기에서 새로운 무덤을 알리며. 동시에 다른 골짜기에서 바람에 실려 류트 소리가 들려온다. 방랑하는 나에게는 노래와 만가輓歌가 동시에 들리는 게 어울리리라. 이 두 소리를 동시에 듣는 이가 나 말고도 또 있을까.
2022.12.28.
나는 별이다 Ich bin ein Stern 나는 먼 지평선에 홀로 떠 있는 별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펴보며, 세상을 경멸하다가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불타버리고 만다. 나는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다. 묵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 그러면서 새로운 죄를 쌓아가는 바다이다. 나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존심 하나로 자랐고, 자존심 때문에 속았다. 나는 국토가 없는 왕이다. 나는 침묵하는 정열이다. 세간이 없는 집에서, 살육이 없는 전쟁에서, 나의 타고난 기력이 쇠약해진다.
2022.12.28.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ätter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Gartenansicht des Hesse-Hauses am Berner Melchenbühlweg 26 (1918)
2022.12.28.
흰 구름 Weiße Wolken 아, 보라. 잊어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나직한 멜로디처럼 구름은 다시 푸른 하늘 멀리로 떠간다. 긴 여로에서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나 바다나 바람과 같은 하얀 것, 정처 없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에.
2022.12.28.
꽃핀 가지 Der Blütenzweig 쉼 없이 바람결에 꽃핀 가지가 나달거린다. 쉼 없이 아이처럼 나의 마음이 흔들린다. 갠 나날과 흐린 날 사이를 욕망과 단념 사이를. 꽃잎이 모두 바람에 날려 가고 가지에 열매가 열릴 때까지. 치졸한 거동에 지친 내 마음이 차분히 평온에 싸여 인생의 소란한 놀이도 즐거웠고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때까지.
2022.12.28.
연애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천국에의 동경을 느끼지 못하고 흐뭇하게 여기고만 걸어간다면 영원을 청춘에게 약속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시를 아, 조용히 포기하는 것이다.
2022.12.28.
여행의 비결 Reisekunst 목표도 없이 떠도는 것은 젊은 날의 즐거움이다. 젊은 날과 함께 그 즐거움도 나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목표나 의지를 의식하게 되면 나는 그곳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목표만을 좇는 눈은 떠도는 재미를 알지 못하고 여로마다 기다리고 있는 숲과 강과 갖가지 장관도 보지 못한다. 나는 떠도는 비결을 계속 배워 나가야 한다. 순간의 순수한 빛이 동경의 별 앞에서도 바래지지 않도록.
2022.12.28.
여행의 비결은 이것이다. 세계의 행렬에서 함께 몸을 숨기고 휴식 때도 사랑하는 먼 곳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것.
2022.12.28.
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들이 땅속에서 조용한 나날을 가지면 이내 새로운 그리움으로 하여 너의 나날은 너의 괴로움이 되는 것을.
2022.12.28.
그리고 영혼은 속박에서 벗어나 밤의 기이한 세계에서 깊이 천배나 살기 위하여 자유로운 날개로 떠오르려 한다.
2022.12.28.
행복 Glück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네 것일지라도.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하는 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표와 욕망도 잊어버리고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행위의 물결이 네 마음에 닿지 않고 너의 영혼은 비로소 쉬게 된다.
2022.12.28.
사랑스런 환영幻影이여, 너의 놀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나를 보아라. 남들에게는 목적과 목표가 있지만 나에게는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일찍이 내 마음에 닿았던 것은 모두 내가 늘 생생하게 느끼던 끝없는 것, 유일한 것의 비유로만 보인다. 그런 상형문자를 읽는 것은 늘 나에게 산 보람을 주리라. 영원과 본질이 내 자신 속에 있음을 알기에.
2022.12.28.
그에게 무엇을 빌어야 할까… 내가 괴로워하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나를 괴롭힐 것은 하나도 없다.
2022.12.28.
잘 있어라, 흥겨운 형상의 세계여 가면무도회여,
2022.12.28.
시끄럽게 떨어지는 커튼 뒤에 낯익은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 적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간다
2022.12.28.
사랑하는 아들아, 사람들의 말에는 많든 적든 결국은 조금씩 거짓말이 섞여 있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기저귀에 싸였을 때와 후에 무덤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정직한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조상 옆에 누워 드디어 현명해지고 서늘한 청명에 싸여 백골로 진리를 깨우친다.
2022.12.28.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공기이며,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도 그 공기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그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다 줄 것이다.
2019.01.15.
깃털을 달고 실로 그물을 엮은 주술 장식 ‘꿈을 잡는 거미줄(드림캐처)’도 이 부족의 전설에 등장하는 아시비카시라는 거미 여인이 부족민을 보호하기 위해 처음 만든 것이다. 땅에 네 개의 방향을 표시하는 돌들을 우리의 윷판처럼 배열한 ‘신성한 원(메디신 휠)’ 역시 이들의 종교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2019.01.22.
그리고 민속학에서 사용하는 ‘토템’이라는 용어도 본래는 오지브웨 어의 ‘도댐’에서 가져온 것으로, 특정한 동식물이 집단의 조상이나 개인과 혈연 관계에 있어서 그것들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여긴 부족의 믿음과 관계가 있다
2019.01.22.
혼자 산 정상이나 밀림 속으로 여행을 떠나 대자연의 절대 세계와 마주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이 전통 의식을 통해 부족의 아이들은 인생의 의미를 묻고 계시로써 그 답을 들어 성인이 될 수 있었다.
2019.01.22.
얼굴 흰 사람들이 왔을 때 원주민들은 그 사고방식에 따라 그들을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나눠 주어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이 생각이 원주민들 대부분을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19.01.22.
동물과 식물, 인간 등 세상 만물을 하나씩 창조한 뒤 신은 마지막 고민에 빠졌다. 각각의 훌륭한 존재를 만들어 놓긴 했으나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마다 잘나고 훌륭한 존재들이 서로를 파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신 앞에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나 자신이 돕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작은 거미는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가느다란 실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이어서 전체를 연결하는 하나의 그물망을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모든 창조물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 속에서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다. 신은 크게 기뻐했다.
2019.01.22.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별을 흔들지 않고서는 꽃을 꺾을 수 없다.”
2019.01.22.
수콰미쉬 족의 시애틀 추장에서부터 다코타 족의 붉은 새에 이르기까지 부족과 언어가 달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별을 흔들지 않고서는 꽃을 꺾을 수 없다.”
2019.01.22.
문명은 밀물과 같은 것이고, 자연에 기대어 살던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은 썰물처럼 뒷걸음질쳐야만 했다. 자유로이 대지를 여행하던 인디언들은 좁은 울타리에 갇히거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리의 혼은 이 대지와 하나가 되어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한 생명 가진 모든 것들과 함께 언제나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2019.01.22.
저 하늘은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 아버지들의 얼굴에 자비의 눈물을 뿌려 왔다. 우리에게 영원하리라 여겨지던 것들도 이제는 변하려 하고 있다. 오늘은 맑은 하늘이지만 내일은 구름으로 뒤덮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별들과 같으리
2019.01.22.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2019.01.22.
안으며,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인도하듯 그들을 인도한다. 하지만 자신의 얼
2019.01.22.
대지에게 가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가해진다. 사람이 땅을 파헤치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의 삶도 파헤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2019.01.22.
당신들의 신은 우리의 신이 아니다. 당신들의 신은 당신들만 사랑하고 우리는 미워한다. 그 신은 강한 두 팔로 얼굴 흰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감싸 안으며,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인도하듯 그들을 인도한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 붉은 자식들에 대해선 잊어버리기로 한 것 같다.
2019.01.22.
머지않아 당신들의 부족이 홍수에 불어난 강물처럼 이 대지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반면에 나와 나의 부족은 썰물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런 운명은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와도 같은 것이다. 아스라한 별을 지켜보듯이 우리는 소멸해 가는 우리의 운명을 지켜볼 뿐이다.
2019.01.22.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유해가 더없이 성스러우며,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들 조상의 무덤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그럼에도 한 점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조상은 무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자기가 태어난 이 땅과 당신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고 먼 별들 너머에서 헤매는 듯하다. 그러고는 금방 잊혀져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2019.01.22.
남아 있는 날들을 어디서 보내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도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인디언들의 밤은 칠흑처럼 어두울 것이다. 단 한 개의 밝은 별도 지평선에 걸려 있지 않다. 슬픈 목소리를 한 바람만이 멀리서 울부짖고 있다. 냉정한 복수의 여신이 얼굴 붉은 사람들의 오솔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든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파괴자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상처 입은 사슴이 사냥꾼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2019.01.22.
몇 번 달이 더 기울고 몇 차례 겨울을 더 넘기고 나면, 한때 이 드넓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던, 위대한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살던 힘센 부족의 아들들은 모두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한때는 당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2019.01.22.
더 희망에 넘쳐 있던 부족의 아들들이.
2019.01.22.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즐거운 삶을 누렸던, 지금은 이름조차 잊혀진 흩어진 전사들과 그리운 어머니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은 아직도 이곳의 장엄한 침묵을 사랑한다. 설령 최후의 얼굴 붉은 사람이 사라져 우리 부족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하나의 전설로 남을지라도 이 해안은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 당신의 아이들이 황야에서, 슈퍼마켓에서, 고속도로 위에서, 혹은 고요한 삼림 속에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낄지라도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으므로.
2019.01.22.
이들의 헌법은 훗날 미합중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좋게 봐야 자연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여겨졌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은 매우 심오하고 언제나 위대한 창조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2019.01.22.
나무에게 허락을 구했는가? 꼭 필요한 만큼만 잘랐는가? 나무에게 선물을 바쳐 감사 표시를 했는가? 그냥 나뭇가지를 잘랐을 뿐이라고 대답하자, 그 어른은 나를 데리고 나무에게 가서 가지가 잘라진 부분을 만지게 했다. 그리고 무엇을 느끼느냐고 물었다. 내가 축축한 것이 느껴진다고 하자 그는 말했다. 나무가 울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그는, 자연에게서 무엇을 취할 때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쓸데없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혜를 모아 《반응하지 않는 연습》으로 펴냈다.
2019.07.05.
사실 모든 고민은 ‘단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됩니다. 고민의 근원만 알아낼 수 있다면 어떤 고민이든 반드시 해소할 수 있습니
2019.07.05.
• 사는 데 쫓겨 항상 마음에 여유가 없다. •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다. •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2019.07.05.
끔찍한 일, 불행한 사고, 실패가 거듭되어 침울하다. •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는다.
2019.07.05.
이 모든 고민들은 바로 ‘마음의 반응’에서 비롯됩니다.
2019.07.05.
고민의 시작점에는 반드시 ‘마음의 반응’이 있습니다. 마음이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고민을 만들어내는 ‘단 하나의 근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바로 ‘헛되이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9.07.05.
헛되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해질지 상상해보세요. 쓸데없는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침울해하지 않고, 화가 나지 않습니다. 압박감을 느끼지 않게 되고, 남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과거를 돌이키며 후회하지 않고, 앞날에 불안감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그만큼 행복은 가까워지겠지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구원이 아닐까요?
2019.07.05.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란 고민을 늘어나게 만드는 헛된 반응을 ‘애초에 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분노나 불안, 자신을 자책하는 어두운 기분이 생긴다면 재빨리 해소해야 합니다.
2019.07.05.
우리는 그에게서 마음의 헛된 반응을 멈춤으로써 일체의 고민과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마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2019.07.05.
• [2장] 쓸데없이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때라도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 [3장] 불만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 [4장]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나답게 살아간다. • [5장] 승패나 우열에 집착하는 성격을 버린다. • [6장] 이제부터 마음속에서부터 받아들이는 인생을 지향한다.
2019.07.05.
고민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리는 것
2019.07.05.
막연한 결핍감을 느끼면서 ‘이대로 괜찮을까?’ 하고 생각해도 막상 고민의 정체를 모르니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직장이나 집에서 아쉬움, 분노, 실망, 침울,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고법을 모릅니다.
2019.07.05.
① 고민이 있다 ② 고민에는 이유가 있다 ③ 고민에는 해결책이 있다
2019.07.05.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고민은 사라질 수 있다
2019.07.05.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요, 병듦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요,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 또한 괴로움이다.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은 고대 인도어로 ‘둑카Dukkha’라고 합니다. 고난이나 역경을 뜻하는 두Du와 메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뜻하는 카Kha를 합친 말이지요. 삶이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진리가 실감나게 전해지는 표현이지 않나요?
2019.07.05.
매일같이 느끼는 결핍감, 괴로움, 우울함이 본디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명쾌함과 합리성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2019.07.05.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확실히 자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07.05.
우선 있는 것을 있다고 이해하고 내 안에 결핍감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다고 자각해봅시다. 괴로움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삶을 향한 희망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2019.07.05.
고민이 있다고 이해했다면 다음에는 ‘고민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삶에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괴로움은 제거할 수 있다. 분명히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
2019.07.05.
사람은 고민에 직면했을 때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그 고민에 맞서려 합니다. 불쾌한 상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정면으로 마주서서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고 극복해내려 발버둥을 칩니다.
2019.07.07.
괴로움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를 이해하라. 괴로움을 불러내는 것은 쾌(기쁨)를 원해 마지않는 ‘바라는 마음’이다.
2019.07.07.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면 이후 ‘일곱 가지 욕구’로 갈라지게 됩니다. 일곱 가지 욕구를 현대 심리학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생존욕, 수면욕, 식욕, 성욕, 나태욕, 감각욕, 인정욕구 등을 말합니다.
2019.07.07.
‘먼저 바라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일곱 가지 욕구를 낳고 그 욕구에 자극되어 인간은 반응하게 된다. 때로는 욕구를 채우는 기쁨이, 때로는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불만이 생긴다. 그런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2019.07.07.
바라는 마음이 결핍감의 반복이라는 윤회의 홍수를 만든다. 온갖 욕구가 거센 물살이 되어 온몸을 뒤흔들게 된다. 인간은 건널 수 없는 욕망의 진흙탕에 파묻혀 있다.
2019.07.07.
‘바라는 마음’을 불교에서는 ‘갈애’라고 표현합니다
2019.07.07.
마음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란 계속해서 뭔가를 바라며,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목이 마른 법입니다.
2019.07.07.
‘바라더라도 채워진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며, 반응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현실에 대한 이해’입니다.
2019.07.07.
어차피 마음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니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2019.07.07.
결국 타인의 사소한 행동이 거슬려 불만을 느끼게 되는 ‘괴로움’의 정체는 나를 좀더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인정욕구일 뿐입니다
2019.07.07.
우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봅시다. ‘그래 맞아. 내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 바로 이 인정에 대한 욕구 때문에 생긴 불만이 자꾸 나를 괴롭게 만든 거야.’ 인정욕구는 욕심, 욕망 등으로 바꾸어 표현해도 좋습니다. 이처럼 언어를 통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응은 자연스럽게 가라앉게 됩니다.
2019.07.07.
인정욕구는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성격 형성이나 질투심, 남과 비교해 우열이나 승패에 집착하는 심리 등 온갖 심적 고민의 원인이 됩니다.
2019.07.07.
‘있는 것을 있다고 우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나에게는 인정욕구가 있다고 솔직하게 받아들여봅시다. 그렇게만 해도 신기하게 그토록 나를 괴롭게 했던 불만, 여태껏 지녀왔던 억울함, 서운함이 진정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인정욕구라고 하는 ‘마음의 갈증’의 정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불만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2019.07.07.
고민의 이유를 모르면 마음속 괴로움은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고민의 이유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고민은 해결 가능한 과제, 즉 희망으로 바뀝니다.
2019.07.07.
사람은 괴로움의 정체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내고,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나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이전처럼 괴로움에 빠진 상태로 돌아갈 일은 없다.
2019.07.07.
반응하지 않고 우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민을 해결하는 비결입니다. 특히 마음 상태를 살펴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 평소의 스트레스나 분노, 침울함이나 걱정 등 헛된 반응을 잠재우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말로써 확인하기 • 감각을 의식하기 • 분류하기
2019.07.07.
말로써 확인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라벨링’이라고 부릅니다. 마음 상태에 이름을 붙여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일상생활에서도 라벨링을 똑같이 실천해봅시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는 ‘나는 지금 청소를 하고 있다’,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를 하고 있다’, 걷고 있을 때는 ‘지금 걷고 있다
이거완전 트위터아냐
2019.07.07.
이렇게 마음 상태와 행동을 객관적인 말로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시다. 실천해보면 말로 확인할 때 헛된 반응에서 쉽게 빠져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응에서 빠져나오면 마음은 침착함을 되찾게 됩니다. 자신의 상태를 말로 확인하는 작업
2019.07.07.
작업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2019.07.07.
‘말로써 확인하기’, ‘감각을 의식하기’라는 두 가지 방법을 붓다가 살던 시대에는 사티sati라고 불렀습니다. 마음 상태를 잘 살펴보고 의식하면, 헛된 반응은 멈추고 마음은 가라앉으며 깊은 안정과 집중이 가능해집니다.
2019.07.08.
먼저 탐욕은 욕구 과잉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너무 많이 바라고 너무 많이 기대하는 것’입니다. 초조함이나 인간관계를 둘러싼 불만은 대부분 이렇게 너무 많이 바라는 마음에서 옵니다.
2019.07.08.
탐욕에 사로잡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인간은, 본래는 힘이 없던 번뇌에 무릎을 꿇고 온갖 고뇌를 떠안게 된다. 이는 마치 스스로 깨부순 배의 밑바닥에 물이 스며들어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19.07.08.
짜증나고 화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것은 분노 상태다’라고 이해하도록 합시다.
2019.07.08.
마이너스 감정인 슬픔도 분노의 일종입니다. 또한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좌절감을 계속 끌어안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자기혐오나 콤플렉스처럼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 등도 포함됩니다. 이런 분노를 자신 안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인생의 손해라는 점을 명심합시다. 분노는 마음을 이해하는 습관에 따라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노는 서서히 축적됩니다. 신경질적이 되거나 욕구불만에 빠지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변합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2019.07.08.
망상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며, 거의 하루 종일 끊임없이 펼치고 있는 가장 흔한 번뇌입니다. 즐거운 망상만 있다면 좋겠지만, 업무나 집안일 등 할 일이 산더미라고 느껴져 압박감에 짓눌리거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려워 별안간 불안에 휩싸이거나 슬픈 과거를 돌이키며 침울해지는 것 역시 망상에 해당됩니다. 헛된 망상은 서둘러 버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헛된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금 망상을 하고 있다’고 객관적인 말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07.08.
만약 여러분이 고민을 더는 늘리지 않고 충실한 일상에서 오는 감각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면 적당히 반응하는 습관과 망상을 줄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신체 감각을 의식하는 습관을 들이기를 바랍니다.
2019.07.08.
• 고민의 원인은 ‘마음의 반응’이다. • ‘마음의 반응’의 배경에는 ‘바라는 마음’이나 ‘일곱 가지 욕구’가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정욕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마음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로 확인하고, 감각을 의식하고, 탐욕・분노・망상 세 가지로 머릿속을 분류한다.
2019.07.08.
이제 자신의 마음에 탐욕, 분노, 망상 중 어느 쪽이 존재하는지를 관찰해봅시다. ‘욕심이 움직이고 있다’,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것은 망상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어떤 때는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도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 본래의 불교, 즉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입니다.
2019.07.08.
올바른 이해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견해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판단이나 해석, 사안에 대한 견해를 일체 배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2019.07.08.
즉 주관을 배제한 ‘중립적인’ 시선에서 매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9.07.08.
결국 인간이란 애초에 처한 상황이나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 일부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져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2019.07.08.
사실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생각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이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의 전제, 즉 사람들이 가진 입장도 경험도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판단도 개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 즉 삼독으로 치면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집착한다면 그 시점에서 ‘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2019.07.08.
불교가 지향하는 올바른 이해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 이해를 말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집착하기보다 진실이면서 유익함을 줄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자는 뜻입니다.
2019.07.08.
올바르게 이해한 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慢]이 없다. 따라서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응어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2019.07.08.
먼저 간단하게 말로써 판단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앗, 판단했다’라는 알아차림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 ‘실수했나?’, ‘저 사람은 어렵고 불편해’, ‘나는 안 되는 인간이야’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갈 때는 ‘앗, 판단했다’고 알아차리기 바랍니다.
2019.07.08.
떠도는 소문은 판단의 집합체입니다. ‘모두가 판단하는데 나라고 안 될 것 없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도 판단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앞서 그런 쓸데없는 판단이야말로 괴로움을 낳는 원인이라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2019.07.08.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타인과 나 사이에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07.08.
판단이란 이 일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인생은 살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뛰어나고 뒤처지는지 등 단정을 짓거나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2019.07.08.
‘이래야 한다’는 맹신은 결벽증이나 완벽주의, 지나치게 노력하는 성격을 만들어냅니다.
2019.07.08.
판단하는 마음의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기분 좋음’과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에서 얻어지는 ‘쾌락’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두들 판단하는 데 열중하게 됩니다.
2019.07.08.
집착이 고이면 괴로움이 되듯이
2019.07.08.
사람이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 마음속에는 반드시 집착이 있습니다. 마음은 계속해서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같아서, 괴로움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더라도 어느새 집착이 고여 괴로움을 낳게 됩니다.
2019.07.08.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바람이 괴로움을 낳는다. 틀림없이 성공했어야 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판단이 괴로움을 낳는다. 상대방을 향한 기대와 요구가 괴로움을 낳는다. 이런 집착들을 떼어놓지 않으면 자신도 상대방도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다.
2019.07.08.
단정 짓기, 선입견, 일방적인 기대와 요구 같은 판단은 일종의 집착입니다. 속된 말로 하면 ‘마음의 병’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19.07.08.
예전의 바람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있다면, 그 바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망상입니다.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9.07.08.
‘이래야만 한다’는 자기 인생이나 상대방에 대한 기대도 그저 판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망상에 불과한 판단에 집착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2019.07.08.
앞서 판단은 머릿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망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좀 놀라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뭐야, 판단이라는 것이 고작 망상에 불과했던 건가!’라고 얼른 알아차리길 바랍니다. 마치 호랑이 그림자에 겁내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올바른 이해는 마음의 어둠을 걷어내줍니다.
2019.07.08.
괴로움을 낳는 판단을 떼어놓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은 계속 괴로움에 빠져 있기보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과거도 판단도 전부 멀리 떼어놓아 봅시다. 그리고 편안해집시다. 생각해보면, 여러분에게도 판단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무렵의 자유로운 마음을 되찾아봅시다.
2019.07.08.
지나친 긍정도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2019.07.08.
사람을 괴롭히는 판단에는 ‘자기는 훌륭하다’, ‘옳다’, ‘뛰어나다’며 지나치게 긍정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심리를 ‘만慢’이라고 부릅니다.
2019.07.08.
하지만 여기에서 비롯된 교만, 오만, 자부심, 우월감과 같은 생각은 결국 불만이나 자만으로 인한 실패를 초래하고 스스로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2019.07.08.
‘나는 어떻고’, ‘그는 어떻고’라는 생각은 마음에 꽂힌 화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올바르게 바라보는 자에게 괴로움을 반복하게 만드는 자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9.07.08.
‘만’이란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오만이나 자존심, 허영심, 심지어는 열등감이나 자신감이 없다는 생각도 만에 해당합니다
2019.07.08.
결국 ‘진실인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진실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유익함은 어떤 분야든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2019.07.08.
어떤 도시의 왕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들을 궁전으로 불러 모아 코끼리를 만지게 했다.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의 코,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의 다리,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의 꼬리 등 코끼리의 일부만을 만지게 하고, “이제 코끼리란 어떤 것인지 말해보라”고 명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쟁기 자루 같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한 사람은 “돌기둥 같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으며, 한 사람은 “빗자루 같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른 부위를 만진 장님들도 제각기 ‘코끼리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네가 틀리다!”라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은 크게 웃었다.
2019.07.08.
다른 사람들은 매사에 이것저것 판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더는 괴롭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2019.07.08.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라고 명백한 경계선을 긋습니다. 이 마음가짐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2019.07.08.
자신이 훌륭하고 옳다고 믿는 ‘만’이 굳어지면 나와 주위 사람들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2019.07.08.
‘만’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떼어놓으란 말은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이기에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좀처럼 솔직해질 수 없습니다.
2019.07.08.
솔직해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나의 진솔함을 존중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편해집니다.
2019.07.08.
불교 수행법 중에는 ‘참회’와 ‘재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만’, 오해를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사죄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2019.07.08.
어떤 순간에도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2019.07.08.
중요한 것은 거기서 기죽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기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2019.07.08.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은 나 자신이다
2019.07.08.
자신을 부정하면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분노가 생겨납니다. 분노는 본인에게 불쾌한 반응이므로 그런 상태를 해소하고 싶어 공격이나 도피를 선택하게 되지요. 이 두 가지는 생물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2019.07.08.
공격은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성을 잃거나 호통을 치고, 남이 싫어하는 행동으로 상대방을 공격해 기분을 전환합니다. 또는 스스로 책망하고 미워하고, 나쁜 자신을 단죄하고 죽고 싶다고까지 생각하며 자신을 공격합니다.
2019.07.08.
마음의 반응을 무시하고 게으름피우기도 하고 대충하고 툭하면 쉬려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박히려 듭니다. 그저 잠만 자거나 우울해하고 자극과 쾌락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9.07.08.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면, 자기 자신도 주위 사람들도 이 상태를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라는 생각 또한 본인을 부정하는 판단이라는 점입니다. 즉 분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2019.07.08.
불교에서는 어떤 상황이든 분노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웁니다.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07.08.
• 한 걸음 한 걸음씩 바깥을 걷는다. • 넓은 세계를 관망한다. • 자기 자신에게 긍정의 말을 건다.
2019.07.08.
감각의 발생 장소는 눈, 귀, 코, 입, 피부 등 다섯 군데가 있습니다. 감각 하나하나를 지금까지보다 더 강하게 의식해봅시다.
2019.07.08.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는 고독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의 고독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미 고독은 고독이 아닐 것입니다.
2019.07.08.
평소 부정적인 판단이 마음에 솟아난다면 이미 거기서 게임은 끝났다고 받아들이세요. 부정적인 판단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 부정이라는 어두운 망상뿐입니다. 망상이라는 어둠 속에 희망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2019.07.08.
고민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
2019.07.08.
우리는 이제까지 ‘나를 부정하는 판단’이라는 하나의 점만을 계속 보고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2019.07.08.
하나의 점도 집착하면 자연스레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일도 인생 전체를 좌우할 만한 것으로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착에서 한 걸음 떨어지면 고작 하나의 점에 반응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2019.07.08.
지금 자신을 부정하는 판단을 어떻게 멈추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단한 말을 통해 판단 자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2019.07.08.
과거에 묶여서 현재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마음의 번뇌고 사념이며 잡념입니다.
2019.07.08.
그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지금을 주시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며 이제부터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07.08.
지난 과오를 버리고 새로운 과오를 만들지 않는다. 지혜를 깨우친 사람은 선입견에서 자유롭기에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 마음속도 그 바깥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라. 다만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평온함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도, 뒤처진다고도, 대등하다고도 판단하지 마라. 무슨 말을 듣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도록 하라. 평가, 재량, 판단 같은 온갖 번뇌가 소멸한 경지야말로 평온함이다. 그런 자는 이미 승리한 것이니 남에게 질 일은 이제 없다.
2019.07.08.
판단은 망상의 일종이기 때문에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2019.07.08.
현실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미리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019.07.08.
무명(몰이해)의 상태에서 마음이 반응한다. 자극을 접했을 때 마음이 반응해서 감정과 욕구, 망상이 결생結生한다. 결생한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하나의 마음 상태가 생겨난다. 그 마음 상태가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낸다. 그 반응의 결과로 온갖 고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2019.07.09.
즉 첫째 ‘접하고’ 둘째 ‘반응하기 때문에’ 셋째 ‘감정, 욕구, 망상, 기억’ 등 강한 반응의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강한 반응을 결생이라 표현하기로 합니다. 영어로는 마음 형성[mental formation]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2019.07.09.
‘기억에 남고’, ‘표정이나 행동으로 표출되는’ 강한 반응입니다.
2019.07.09.
결생한 반응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2019.07.09.
그보다는 마음이 현재 상태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 이해하고 한 가지 반응의 배후에 있는 다른 반응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2019.07.09.
마음에 남아 있는 과거의 반응을 자각하면 서서히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019.07.09.
과거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처방전
2019.07.09.
가지 처방전
2019.07.09.
첫째는 제대로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9.07.09.
‘기억, 기억, 기억에 불과하다’라고 알아차림의 말, 즉 라벨링
2019.07.09.
둘째는 앞서 소개한 ‘감각을 의식하는 방법’입니다.
2019.07.09.
셋째는 반응의 원천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2019.07.09.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상황도 이윽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선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세요
2019.07.09.
비교하는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역시 인정욕구를 채워 안심하고 싶은 것이지요.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고, 나 정도면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2019.07.09.
아직 자신을 완전히 긍정하지 못하고 온전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비교하는 것은 아닐까요?
2019.07.09.
첫째로 비교라는 마음의 작용은 애초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망상에 불과합니다.
2019.07.09.
둘째로 비교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2019.07.09.
셋째로 비교를 통해 안도감을 얻고 싶다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야만 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2019.07.09.
사람은 직접 경험한 훌륭한 성과만을 바라보며 나 이외의 사람을 열등하게 여긴다. 그것이야말로 괴로움을 낳는 집착이라는 사실을 현자는 이미 알고 있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동등하다고도 열등하다고도 뛰어나다고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이 새로운 괴로움을 낳기 때문이다.
2019.07.09.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다면 올바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
2019.07.09.
인정받고 싶은 기분을 동기부여의 기회로 삼고 현재 업무와 생활을 개선해 나간다. • 어떤 때라도 내 일에 집중한다. •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운다.
2019.07.09.
다만 그것은 동기부여로만 이용해야 합니다. 절대로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19.07.09.
‘인정받고, 평가받고, 성공을 거둔다.
2019.07.09.
타인의 영역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말과 이 순간의 생각,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외의 것은 결국 모두 망상입니다
2019.07.09.
망상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2019.07.09.
개선이란 불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쾌를 느낄 수 있도록 궁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2019.07.09.
반면에 쾌를 느낀다면 마음은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의욕입니다
2019.07.09.
올바른 노력이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라든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와 같이 외부를 향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2019.07.09.
자기 자신 안에서 동기를 만들고 힘써야 합니다.
2019.07.09.
사실 마음이라는 것은 뭔가를 접하면 반드시 반응하는 법입니다.
2019.07.09.
처음부터 바깥을 보지 않고 남을 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감아보라는 것이지요.
2019.07.09.
마음의 안쪽만 주시해보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몰두해야만 하는 일, 즉 진정한 작업으로 향하는 출발점입니다.
2019.07.09.
붓다가 가르치는 팔정도八正道를 일상생활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여덟 가지 항목’으로 붓다가 제시한 실천 메뉴
2019.07.09.
정념이란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
2019.07.09.
정정이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2019.07.09.
정정진, 즉올바른 노력이란 알아차리기와 집중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9.07.09.
선정禪定이라는 고도의 집중 상태로 가져가는 것이 명상 수
2019.07.09.
경쟁 역시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셈입니다.
2019.07.09.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2019.07.09.
‘앗, 망상이 도졌다’, ‘앗, 판단했다’고 알아차리고 리셋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합리적인 사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9.07.09.
자신을 채찍질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뒤로 미루려 하더라도, 자신감이 생기는 상황은 대체로 오지 않습니다. 무리해서 노력하거나 한층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한들 자신감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의 출발점이 ‘나는 아직 멀었다’,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부정적인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자신을 좌절시킨 부정적인 선입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고, 언제까지고 자신감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019.07.09.
10년가량을 넘겼을 때야 겨우 두각을 나타냅니다. 어떤 분야든지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 것이지요.
2019.07.09.
해본다. ② 경험을 쌓는다. ③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게 된다. ④ 주위에서 인정하게 된다. ⑤ 어떻게 해야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2019.07.09.
어떤 사람은 ①의 ‘해본다’는 것부터가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야말로 ‘어렵다는 것은 망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세요. ‘실패할지도 모른다’,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 ‘나 같은 건 아직 멀었다’고 하는 망설임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이 생긴다면 그 또한 망상입니다.
2019.07.09.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됩니다. 일하는 방식을 모르겠다면 “이 일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될 일입니다. 가르침을 받았다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입니다. 민폐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라고 솔직하게 사과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처음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보세요. 이런 태도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는 어떤 업무나 분야에서든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법입니다.
2019.07.09.
만약 매도하는 자에게 매도를,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를, 언쟁하려는 자에게 언쟁을 되돌려준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식사를 받아들이고 같은 것을 먹은 셈이 된다. 나는 그대가 내어준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제 그대의 말은 그대만의 것이다. 그대로 들고 돌아가도록 하라.
2019.07.09.
이런 붓다의 합리적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는 이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승리란, 상대방에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반응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2019.07.09.
“바라문이여, 그대가 집에서 대접한 요리를 손님이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질문을 받은 이상 바라문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내 것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그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직접 먹어야지”라고 바라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019.07.09.
바로 상대방의 반응은 상대방에게 맡긴다는 사고법입니다.
2019.07.09.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는 항상 ‘만’과 ‘만’의 부딪침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이 있지요. 그 생각을 밀어붙여 ‘내가 옳다’고 확인하려는 것이 바로 언쟁하는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2019.07.09.
우선 ‘옳음’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옳다는 판단이 그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알겠어?’라고 억지로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옳은 것이군요’라고 그저 이해할 뿐입니다.
2019.07.09.
애초에 사람은 각각 다른 ‘뇌’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고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내심 기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기대나 선입견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2019.07.09.
‘상대방과 나의 반응을 구별해서 생각한다’, ‘상대방의 반응은 상대방에게 맡긴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로 고민하지 않기 위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2019.07.09.
이때 뒤쪽을 향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지는 않은지, 긴장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망상이 솟아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것이지요.
2019.07.09.
‘반응하기 전에 잠시 이해하라’는 태도를 관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9.07.09.
다만 만일 이쪽에서 상대방과 똑같은 반응을 돌려주면 상대방의 반응에 응수하는 셈이 됩니다. 이때 상대방에게 지지 않는 것이나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019.07.09.
들여다보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연습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상대방과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마음의 반쪽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나머지 반쪽은 내 마음 안쪽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 사용해보세요. 그리고 이를 상대방을 마주하는 방식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좋겠습니다.
2019.07.09.
‘관계 방식’이란 어떤 마음을 상대방에게 향하게 할 것인지를 뜻합니다. 앞서 말한 사고법을 실천하면,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을 향하게 할지를 확립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시달리지 않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2019.07.09.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다
2019.07.09.
왜냐하면 판단은 항상 자신의 인정욕구, 즉 ‘만’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019.07.09.
나는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에 대한 집착을 그저 집착이라고 이해하고, 타인이 범한 과오를 과오라 이해하며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을 주시하며 마음의 평안과 청정을 지킨다.
2019.07.09.
과
2019.07.09.
하지만 그 상황이 끝나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답답하며, 개운치 않고 짜증이 난다면 그 원인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기억입니다
2019.07.09.
싫은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그 기억에 대한 내 반응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상대방과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을 때는 ‘이것은 단지 기억이다’, ‘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지 상대방은 관계없다’고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해봅시다.
2019.07.09.
상대방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도 마음도 무상, 즉 변해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2019.07.09.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시시각각 계속 변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서로 시시각각 계속 변하는 마음으로 인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이해했다면 이제 내가 마주하는 상대방은 항상 새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2019.07.09.
이런 때야말로 마음의 반쪽을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다른 반쪽은 내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반응하려는 마음에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
2019.07.09.
하지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점은 자신이 생각하는 ‘인내’가 정확하게는 상대방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
2019.07.09.
자신의 뜻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상대방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2019.07.09.
전반적으로 ‘쾌인가 불쾌인가’라는 반응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2019.07.09.
생물은 욕구가 채워졌을 때 쾌를 느낍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욕구를 부정하지 않고 채워주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입니다.
2019.07.09.
붓다의 사고법에서는 불쾌의 상태인 괴로움을 느끼게 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늘 사람의 인생은 욕구에 사로잡혀 불쾌를 느끼는 모습과 쾌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뉩니다.
2019.07.09.
다시 말해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이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인정욕구입니다.
2019.07.09.
문제는 인정욕구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상태로 변질된다는 데 있습니다. 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② 그 욕구에 반응해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 망상한다.
2019.07.09.
망상이 넘치면 선입견이 됩니다
2019.07.09.
어떤 생각이든 망상에 불과하다고 확실히 자각하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망상이라는 뇌의 불순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2019.07.09.
망상에 대처하기 위해 몇 가지 알아둬야 할 방법
2019.07.09.
우선 망상에는 끝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2019.07.09.
더구나 각각의 기억은 복합적으로 결합하기 때문에 여태껏 본 적 없는 망상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의 분노나 우울, 의심 등의 정신 상태가 작용해서 본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선입견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9.07.09.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사람은 망상을 그만두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망상하는 버릇 자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고민의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2019.07.09.
이 사람의 스트레스는 일이나 인간관계가 원인이 아닙니다. 사실은 마음속에 항상 떠도는 어머니의 환영, 즉 어머니에게 간섭을 당했던 기억과 분노의 감정이 줄곧 그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2019.07.09.
‘연기론緣起論
2019.07.09.
애초에 마음은 항상 방황하고 채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성질을 처음으로 간파한 사람은 붓다였습니다.
2019.07.09.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보는 것은 불타고 있다. 보는 마음은 불타고 있다. 탐욕이라는 불꽃이, 분노라는 불꽃이, 망상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마음에는 고뇌, 쇠약, 상실, 근심과 슬픔, 아픔과 번민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2019.07.09.
반응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 삼독 등 나쁜 반응을 정화해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 • 사람들과 인생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모
2019.07.09.
사람에게는 본래 욕심과 분노와 망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이런 인간의 번뇌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이용함으로써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서 해답을 구한들 결국은 욕심과 분노와 망
2019.07.09.
그럴 때일수록 잠시 동안 눈을 감아봅시다. 호흡을 느끼고 어둠을 주시하기 바랍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입니다.
2019.07.09.
느낍니다. ‘살아 있는 온갖 것이여, 행복해져라’라고 슬픔의 마음을 향해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몇 번이고 안식처로 돌아가봅니다. 나도 모르게 바깥
2019.07.09.
사람은 뭔가를 바라며 살아간다. 하지만 바라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지 않은가. 즉, 잘못된 것을 바라는 것과 올바른 것을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라는 것은 늙음과 병과 죽음이라는 ‘상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생겨난다. 누구라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올바른 것을 바란다는 것은 이런 잘못을 알아차리고 상실을 초월하여 인간적인 고뇌에서 떨어진 삶의 태도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잘못된 것을 바라며 살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2019.07.10.
올바른 사고 중 하나는 방향성을 본다는 사고법입니다.
2019.07.10.
이는 세속적인 가치를 손에 넣는 것을 방향성으로 삼은 삶의 태도입니다.
2019.07.10.
나는 늙어가는 마음을 늙음이 없는 마음으로 바꾸리라. 고뇌하는 마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평온함으로 최고의 납득으로 바꿔 가리라.
2019.07.10.
사람은 항상 뭔가를 좇습니다. 바라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하고, 손 안에 들어온 것을 잃어버리는 현실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을 살면서도 현실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뇌를 초월한 납득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반드시 다다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2019.07.10.
집착의 근저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불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무명無明, 즉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2019.07.10.
‘알아차림’과 ‘인정욕구’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주목하여 설명합니다. 원시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알아차림’은 사티sati라는 팔리어를 번역한 말로, ‘지금 이 순간의 현상에 집중하여,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고 그저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에 관한 일체의 생각을 내려놓고 지금 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자는 것이지요.
2019.07.10.
나의 경계선은 나만의 내밀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나의 선택 권리를 지켜준다. _제라르 맨리 홉킨스|시인
2019.05.04.
그것은 ‘관계의 틀’ 때문이다. 일정한 모양의 빵을 계속 구워내는 빵틀처럼 인간관계에는 틀이 있다. 이 틀로 말미암아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비슷한 관계방식을 되풀이한다. 문제는 그 기본 틀이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기본 틀은 ‘아이-어른’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어른-어른’의 관계에는 맞지 않는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아이-어른’의 관계틀을 ‘어른-어른’의 관계틀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관계 손상을 겪은 사람들의 기본 틀은 잘 바뀌지 않는
2019.05.22.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관계방식으로 오늘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겪는 관계의 어려움은 상대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당신의 관계방식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고 과거의 관계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는 반복된다.
2019.05.22.
그렇다면 바운더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인간관계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게 하는 자아의 경계이자, 관계의 교류가 일어나는 통로를 말한다. 자아의 진짜 모습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바운더리라는 형태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2019.05.22.
이 바운더리의 핵심 기능은 보호와 교류다. 바운더리에 이상이 있다는 말은 ‘나’와 ‘나 아닌 것’을 혼동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를 보호하지 못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잉보호를 하는 등 상호교류에서 어려움을 보인다
2019.05.22.
바운더리 심리학은 지금 모습으로 충분하다는 위로의 심리학이 아니라 당신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변화의 심리학이다
2019.05.22.
바운더리를 건강하게 재구조화하기 위해 우리가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하려고 한다.
2019.05.22.
인간이 놀라운 사회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관계의 작은 손상에도 고통을 잘 느끼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높은 사회적 협력이야말로 ‘사회적 고통의 예민함’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2019.05.22.
미숙한 착함에는 자기도 모르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들의 친절은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늘 보상을 요구한다.
2019.05.22.
‘성숙한 착함’과 ‘미숙한 착함’이다. 먼저 ‘미숙한 착함’, 이것은 간단히 말해 ‘순응’이다
2019.05.22.
그러니 어른이 아이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따라 한다면 착한 것이 아니라 미숙한 것이다. ‘아이-어른’의 관계에서는 필요했던 ‘순응’이라는 방식을 ‘어른-어른’의 관계에서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019.05.22.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구분해서 행동하고, 어려움을 겪는 누군가를 보면 안타깝게 여기고 친절을 베푼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희생’을 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선善은 미숙함일 뿐이다
2019.05.22.
미숙한 착함에는 의도가 있다.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거나, 상대의 호감이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친절과 배려의 대가를 바라는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
나도 생각나고 누군가도 생각난다.
2019.05.22.
특히 자존감이 낮을수록 다른 사람의 관심, 인정, 평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기가치감이 부족하고 자신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가치감의 결핍을 다른 사람의 호감과 평가로 채우려고 애를 쓴다.
2019.05.22.
이들의 친절은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늘 보상을 요구한다. 자신의 배려와 마음씀에 대해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이나 보답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9.05.22.
마찬가지로 사회적 고통은 곧 관계를 잘 돌보라는 신호다. 상대가 나를 무시해도,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도 우리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애초부터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2019.05.22.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2019.05.22.
공유 영역은 나와 너의 바운더리가 일부 허물어지며 생겨난 곳이라 어느 한 사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이면서 ‘너’인 ‘나-너I-You’의 영역이다. 누군가를 만나 이렇게 바운더리가 허물어지고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누군가와 자주 만나는데도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경계가 명료하다면 그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일 뿐이다.
2019.05.22.
문제는 이 친밀함의 양면성에서 생겨난다. 친밀함은 나에게 상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연결감과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늘 또한 있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서로의 바운더리가 겹쳐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너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상대를 나의 일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누가 뭐라고 해도 상대는 끝까지 내 편이기를 바라고, 상대가 내 생각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기를 바란다. 양상은 다르지만 결국 상대가 상대의 모습대로가 아니라 내 기대대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커진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독립적인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관계의 소유욕’이 생기는 것이다. 어린아이일수록 이런 욕구가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가 늘 자기만 바라봐주기를 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기를 바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부모도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이렇듯 친밀한 관계는 ‘연결감’이라는 빛과 함께 ‘소유욕’이라는 어둠이 늘 같이한다
2019.05.22.
우선 ‘건강한 하나됨’은 불완전한(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되 각자의 개별성을 유지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말한다.
2019.05.22.
‘신경증적인 하나됨’이 있다. 후자의 중심에는 유아적 애착욕구가 있다. 갓난아이는 양육자가 잠시 떨어지는 것도 공포로 여기고, 양육자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아주고 돌봐주기를 바란다. 아이에게 양육자의 사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안중에도 없다. 아이는 오직 자기 안위에만 신경을 쓴다.
2019.05.22.
애착이란 자기 생존을 위한 일방적인 집착과 의존을 말한다. 인간의 애착욕구는 동물 중에서도 가장 강하기 때문에 안정적 애착이 형성되는 3세 이후로도 지속되어 정도는 덜하더라도 여전히 양육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자기만 위해주기를 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기를 원한다. 유년기 이후의 이러한 애착욕구는 상대를 나의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보는 ‘소유로서의 하나됨’, 간단히 말해 소유욕이다. 유아의 애착욕구는 정상이지만 성인의 애착욕구는 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는 원인이 된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상대가 자기만 바라봐주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주고, 자기 기대에 부응해주기를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2019.05.22.
이런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유아기에 애착손상을 반복적으로 겪은 탓에 어른이 되어서도 애착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애착손상으로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늘 내면의 결핍을 느낀다. 이 결핍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문제를 일으킨다. 결핍은 늘 과잉을 부르기 때문이다. 애착결핍은 애착갈망으로 이어져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지고 상대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연애 초기에는 호르몬의 분출로 어느 커플이나 늘 함께 있고 싶고 뭘 해도 좋아 보이고 서로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치 어릴 때 양육자와 공생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강력한 융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랑은 이내 열정이 시들고 그 자리에 우정과 친밀함이 깃든다. 혼란을 겪지만 결국 융합의 관계는 재분화가 일어나 ‘나’ ‘너’ ‘우리’의 관계로 재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착결핍을 가진 이들은 이러한 재분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2019.05.22.
그럼 신경증은 무엇인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는 것’ ‘상대가 내 기대대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 이 역시 신경증적 바람이다.
2019.05.22.
내면의 결핍이나 삶의 불만을 관계를 통해 채우려고 한다. 2. 가까워지면 상대가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개별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만다. 3. 가까워질수록 상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가 많아지고, 상대가 자기 기대대로 바뀌기를 요구한다. 상대가 바뀌지 않으면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며, 상대를 가해자로 자신을 피해자로 여긴다. 4. 자신을 늘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해주기를 바란다. 5. 비대칭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어, 정작 상대방이 자신에게는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2019.05.22.
사람끼리 가까워지면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의 끈이 생긴다. 그 끈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사랑・친밀함 같은 좋은 감정의 끈도 있지만, 두려움・죄책감・질투・미움 같은 안 좋은 감정의 끈도 있다. 물론 대개는 둘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감정의 끈은 무척 질기다. 끊어내고 싶어도 잘 끊어지지 않는다. 생긴 지 오래된 끈일수록 끊어내려고 하면 더 깊이 꼬여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도 같다.
2019.05.22.
잘라내는 데 따르는 고통은 그냥 참고 견디는 고통을 훨씬 능가할 것처럼 느껴진다. 악연이 이어지는 이유다.
2019.05.22.
두려움은 기질에 따라 상대에게 순응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고, 거꾸로 상대를 통제하고 확인하려는 강요로 나타날 수도 있다.
2019.05.22.
감정사슬을 이루는 첫 번째 부정적 감정은 ‘두려움’이다.
2019.05.22.
감정사슬을 이루는 두 번째 부정적 감정은 ‘과잉책임감’이다
2019.05.22.
건강한 책임감은 자신의 인생과 역할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러나 ‘과잉책임감’은 이를 넘어 상대의 존재 자체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상대의 불편한 감정, 상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 더 나아가 상대가 살아갈 인생 등을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줘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2019.05.22.
감정사슬을 이루는 세 번째 부정적 감정은 ‘신경증적 죄책감’이다. 건강한 성인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낀다.
2019.05.22.
이들은 애초부터 ‘나’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죄책감이 자기개선이나 상대에 대한 진정한 사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9.05.22.
우리 자아에는 일종의 ‘감정 필터’ 역할을 하는 바운더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잘 옮는 사람은 바운더리라는 필터가 너무 성기고, 감정 전염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은 필터가 매우 촘촘한 셈이다.
2019.05.22.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잘못과 관계의 문제를 끝까지 상대 책임으로 돌리며, 상대가 스스로를 의심하다 결국 본인 탓을 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2019.05.22.
감정조종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 오직 자신의 불편한 감정에만 집중하고 상대를 이기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지배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에서의 갈등이 상대방 책임이라고 생각하므로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상대의 감정을 집요하게 움켜쥐고 자기 뜻대로 감정을 조종하려 든다. 이를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고 한다.
2019.05.22.
일반적으로 투사projection가 ‘자신의 감정이나 문제를 상대 탓으로 떠넘기는 것’이라면, 투사적 동일시란 ‘상대가 나의 감정과 문제에 책임을 느끼도록 집요하게 유도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투사적 동일시는 ‘자신의 감정이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상대가 떠안게 하는 것’이다. 문제를 공에 비유하면, 투사가 공을 상대를 향해 던지는 것이라면, 투사적 동일시는 상대에게 가서 상대의 손에 공을 꽉 쥐여주고 손을 펴지 못하게 해서 상대가 그 공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2019.05.22.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는 자신감과 자율성을 잃고, ‘나는 상대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투사적 동일시를 차차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하자!’에서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감정 조종은 더욱 거세진다. “너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아. 나에게 상처를 줬어” “너를 만나 내 인생이 불행해졌어” “너는 너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등 상대 탓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친친 동여매듯 여러 가지 감정사슬을 펼쳐 묶어놓는다. 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상대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수직적 관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은 힘든 감정에서 벗어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느끼며 우쭐해진다.
2019.05.22.
늘 잔소리하는 사람과 계속 잔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 가학적인 사람과 피학적인 사람이 한 쌍을 이루듯 감정조종자들은 감정을 조종하기 쉬운 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2019.05.22.
쉽게 말해 자아의 바운더리가 희미한 사람들, 자기 세계가 채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주장을 거르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감정조종의 대상이 된다. 감정조종자들은 바운더리가 희미한 이들을 본능적으로 잘 알아보고 휘두르지만,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쉽게 조종하지 못한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처음에는 감정조종자들을 미처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자각하고 밀어내거나 차단할 수 있다.
2019.05.22.
감정조종자들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어 상대의 감정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에 비해 피조종자들은 바운더리가 너무 희미하고 열려 있어 상대의 감정을 빠르게 흡수하고, 심지어 통제와 간섭마저 관심과 애정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뒤늦게 자신이 휘둘리고 있음을 깨닫지만 이미 감정사슬이 얽힌 상태라면 어디까지가 상대의 문제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의 문제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2019.05.22.
놀라운 사실은 일부 피조종자들은 관계가 이렇게 착취적이더라도 혼자 있는 단절보다는 안도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나쁜 관계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이들의 고단한 마음에서 인간이 뼛속까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엿보인다.
2019.05.22.
우리의 자아에도 경계, 즉 바운더리가 있다. 바운더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상대의 생각, 나의 취향과 상대의 취향,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 등을 ‘나’와 ‘상대’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바운더리는 물건의 소유관계를 확인하듯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 생각이거나, 내 욕구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에게 가진 욕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다.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자아의 ‘바운더리’는 자신의 심리적 형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2019.05.22.
이 세포막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바운더리다. 바운더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유년기에는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환경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수록 차차 자아가 만들어지면서 바운더리도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 감정, 욕구, 가치관 등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건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2019.05.22.
바운더리는 자신을 보호할 만큼 충분히 튼튼하되,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어야 한다. 세포막처럼 유연해야 한다. ‘튼튼하면서 열려 있어야’ 한다니, 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2019.05.22.
첫째, ‘자타식별self-other discrimination’이다. 쉽게 말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한다. 외부 대상과 자신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부터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생각, 욕구, 감정, 소유, 역할, 책임 등을 지각하고 구분하는 것까지를 다 가리킨다. 어린아이들은 자타식별을 잘 못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가게에서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집어 나오기도 하고, 친구의 장난감을 말도 없이 갖고 올 수도 있다. 다섯 살이 안 된 아이들은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 내 경험과 상대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 또한 모른다. 상대가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독립적인 인간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상대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상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자아중심성egocentricity’이라고 한다. 나와 너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미숙함을 가리키지만 그 또래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특성이다.
2019.05.22.
둘째, ‘자기보호self-protection’다. 바운더리는 외부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외부와 뒤엉키지 않고 형태를 보존할 수 있다. 동물들은 모두 자기 영역이 있으며 낯선 존재가 허락 없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방어와 공격 태세를 갖춘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건강한 자아의 바운더리에는 ‘위험 감지 센서’가 있다. 위험이 다가오면 알람이 울리게 되어 있다. 이 장치의 센서는 너무 과민해서도 안 되고 너무 둔감해서도 안 된다. 위험하지 않을 때에는 바운더리가 잘 열려야 하고, 위험할 때는 알람이 울려 바운더리를 닫아야 한다.
2019.05.22.
셋째는 ‘상호교류mutual interchange’다. ‘자기보호’만큼이나 중요한 기능이다. 인간이 집을 만들 때 담만 쌓지 않고 문을 만드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기 위해서다. 인간에게 교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된 인간은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와 같다. 물론 대상에 따라 달리 개방해야 한다. 좋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운더리가 존재하는 궁극의 목적이다.
2019.05.22.
그러나 성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할 것이라 기대하고,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른의 당연한 특성일까? 바운더리가 건강한 어른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독립적인 인간’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바운더리가 건강한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관점은 흐려지기 쉽다.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를 바라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바운더리가 무너지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019.05.22.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내적 상태를 반영해서 바깥으로 표현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내적 상태와 외적 표현이 크게 어긋난다. 친구가 약속을 잊어버려서 화가 났는데 정작 상대 앞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뭘” 하는 것처럼.
2019.05.22.
바운더리에 생긴 이상은 간단히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남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아를 보호하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바운더리vague boundary’와 반대로 교류하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폐쇄적인 ‘경직된 바운더리rigid boundary’다
2019.05.22.
한 사람의 바운더리도 마찬가지다. 경계가 모호하면 자기 세계가 약하고 외부에 휩쓸리기 쉽다. 동의 없이 아무나 내 삶에 개입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삶에도 지나치게 관여하기 쉽다.
2019.05.22.
말하면 이들은 ‘나’밖에 모르고 자기 생각과 느낌에 매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견해를 고려하지 못한다. 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거나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도 별다른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2019.05.22.
나르키소스가 자아에 몰두했다면 에코는 정반대로 자아를 잃어버린 채 대상에 몰두했다. 이들은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잃어버린 ‘자아몰두’와 ‘대상몰두’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2019.05.22.
에코는 자아가 형성되지 못한 채 관계에만 매달리는 희미한 바운더리를 지녔다. 이 두 인물의 최후는 어떤가? 파멸이다.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잃어버린 인간은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말해준다.
2019.05.22.
자기를 보호하는 것은 폐쇄적인 것도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를 보호하지 못하면서 관계를 맺는 것, 자기를 돌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돌보는 것이 미숙함이다. 건강한 관계란 나를 돌보면서 친밀해지는 것을 말한다.
2019.05.22.
바운더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건강한 바운더리는 유연하다. 대상과 친밀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였지만 반복적으로 불신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바운더리는 언제든 다시 조율되어야 한다. 한번 믿었다고 끝까지 믿거나, 처음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계속 거리를 두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2019.05.22.
살아가면서 만나고 경험하는 많은 관계 속에서 바운더리는 건강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허물어지거나 경직될 수도 있다. 어릴 때의 경험이 바운더리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자각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바운더리를 다시 세울 수 있다. 힘들겠지만 바운더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인간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2019.05.22.
친한 사이라면 벽 따위는 허물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서로를 경계하는 벽은 허물더라도 나와 상대를 구분하고 자기를 보호하는 바운더리까지 허물어서는 곤란하다. 친밀하다는 것은 서로의 바운더리를 더 열어가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다. 경계가 없어진다고 더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친한 상대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더 묻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상대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할 때가 있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친밀함은 위험하다. 바운더리가 사라지면 상대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다. 모든 것을 다 터놓고 투명하게 살아야 좋은 부부관계일까? 모든 시간을 함께하면 좋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좋은 부부관계는 ‘나, 너, 우리’가 조화를 이룬 관계다. 어딘가에 균형점이 있게 마련이며, 그것을 넘어서면 오히려 관계에 해가 된다.
2019.05.22.
절반만 맞는 말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자기 주장을 잘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적인 관계에서는 비판단적인non-judgemental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때로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침묵할 줄 알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표명하고, 누구의 잘못인지 시시비비를 가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가만히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대의 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 주장만큼이나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2019.05.22.
그리고 자신의 무능감을 견디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2019.05.22.
아이는 공생적 관계에서 벗어나 모든 공포와 고독 그리고 자신의 무능감을 견디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2019.05.22.
인간이란 평생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싶고, 멀어지면 가까워지고 싶은’, 즉 고슴도치 딜레마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2019.05.22.
‘접근’과 ‘회피’라는 근본적인 두 힘이야말로 인간관계의 핵심 갈등core conflict이다.
2019.05.22.
아이는 공생적 관계에서 벗어나 모든 공포와 고독, 자신의 무능감을 견디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 과정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오락가락 변덕스럽다. 그것이 자아의 분화와 독립에 나타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애착대상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이의 혼란과 모순된 욕구를 잘 받아줘야 한다
2019.05.22.
자아 탄생의 기준을 30개월 전후에 생겨나는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이라고 보았다. 이 낯선 용어는 무엇을 뜻할까? 아이가 애착대상이 눈앞에 없더라도 실제 애착대상이 있는 것처럼 심리적 위안을 느끼고 잠시 혼자 있을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애착대상이 엄마라면,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의 이미지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아야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엄마라는 실체가 눈앞에 있어야만 마음이 안정되었다면, 대상항상성이 생긴 뒤에는 엄마의 이미지가 내면에 새겨져 잠시 혼자 있더라도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위안의 내재화soothing introject’라고 하며, 성인의 정서조절 능력의 밑바탕이 된다.
2019.05.22.
첫째, ‘혼자 있는 능력capacity to be alone’, 둘째, 좌절과 불안을 다독일 수 있는 ‘정서조절 능력’, 그리고 셋째, 자기 욕구에 기반을 둔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능력’이다.
2019.05.22.
대상항상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애착대상이 관계 속에서 보여준 수많은 위로와 지지, 포옹과 애무의 느낌, 따뜻한 미소와 눈 맞춤, 같이 놀았던 경험 등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기억의 퇴적물이다. 눈
2019.05.22.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아이는 자신의 기호・감정・취향・욕구 등을 신뢰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게 되며, 바운더리가 제대로 발달할 수 없다.
2019.05.22.
고집스러운 아이, 불안한 성향을 가진 아이는 애착손상이 잘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평범한 엄마를 만나더라도 자기 성향 때문에 쉽게 좌절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모든 게 서툰데도 꼭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하고, 불안감이 지나쳐서 양육자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기질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채 어른이 되면 인간관계에서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거나 이기려 하고, 불안감 때문에 계속해서 상대에게 의지하거나 상대를 믿지 못하기 쉽다.
2019.05.22.
유전적으로 불안성향이 높은 아이들은 늘 인간관계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되어서도 낯가림이 심하고, 남 앞에 나서기를 유독 두려워하고, 상대의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거절에 예민하고, 어쩌다 한마디하고 난 뒤에는 걱정과 고민을 놓지 못하는 편이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
2019.05.22.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양육자가 제아무리 애착손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해도 아이에게 애착욕구를 좌절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2019.05.22.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착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애착은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유리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오히려 더욱더 단단해지는 인간의 몸과 같다
2019.05.22.
뒤늦게라도 아이의 좌절된 욕구와 위로받지 못한 감정을 이해해주는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아이의 애착손상은 충분히 회복된다.
2019.05.22.
안정적 애착이란 끝없는 ‘단절-회복brake-repair’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동아줄이지, 부모의 초인적 인내와 정성으로 한 번도 금가지 않고 빚어낸 도자기가 아니다.
2019.05.22.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는 ‘적절한 애착손상’이 필요하다.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애착손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애착손상이 심각한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애착욕구의 좌절’은 세상을 헤쳐나갈 독립심을 주고,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기초가 되고, 대상의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을 바라보고 통합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좌절은 발달의 중요한 요소다.
2019.05.22.
심리학자 에미 워너Emmy Werner는 1955년부터 30년 넘게 이루어진 이 종단연구에서 애착손상이 심각했던 201명의 고위험군을 관찰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부모의 가난, 질병, 범죄, 불화 등으로 인해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 아이들 중에 무려 3분의 1인 72명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난 것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조부모・친척・성직자・교사・친구 등 주변 인물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이 이들을 사랑해주고 지지해주었다는 점이다.
2019.05.22.
유전자와 유년기 경험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전자의 영향을 거스를 수 있고, 유년기 경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손상된 애착이 복구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관계를 복구시킬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밀하다는 것은 갈등과 좌절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좌절을 풀고 관계를 다시 회복했다는 것이다. 모든 친밀함은 고통을 동반한다. 다만 그 고통을 해소하여 자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는 것보다 관계의 상처를 잘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2019.05.22.
동양은 인간을 관계중심적인 존재로 파악한 반면에 서양은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파악해왔다(인간이라는 용어조차 동양은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를 뜻하지만, 서양은 human being으로 표기한다). 그렇기에 동양권에서는 ‘자아’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다. 심지어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2019.05.22.
‘저맥락대화Low-context communication’란 말하는 내용 외에 숨은 뜻이 거의 없는 표현방식을 말한다. 그에 비해 ‘고맥락대화High-context communication’란 말하는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나 숨은 뜻이 많은 표현방식을 말한다.
2019.05.22.
우리 사회가 불행한 진짜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만 사랑하느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문화가 점점 더 장악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개인의 자존감 회복도 중요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발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개별성을 획득하지 못한 미분화와 상호성을 잃어버린 과분화가 모두 문제인 것처럼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미성숙한 사회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양 극단에 치우쳐 있다.
2019.05.22.
인간의 사회성이 위대한 이유는 놀라운 협력을 이루면서도 개별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9.05.22.
자아와 관계의 균형, 개인과 집단의 조화는 인간만이 갖는 경이로운 특징이다. 가장 역동적이고 창조적이고 건강한 사회는 개인과 집단의 균형을 이룬 곳이다.
2019.05.22.
애착손상이 빚어낸 자아발달의 왜곡과 인간관계의 문제는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나서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럴 때 유용한 개념이 바로 ‘바운더리’다. 단순화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바운더리라는 개념을 통해 한 사람의 자아발달의 문제를 이해하고, 관계의 어려움을 파악할 수 있다.
2019.05.22.
첫째, 자아가 대상과 단절되어 분리된다(과분화). 둘째, 자아가 대상으로부터 분화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공생관계에 머무른다(미분화).
2019.05.22.
첫째,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불안해하며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한다(억제형). 둘째, 반대로 거리 조절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다가가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한다(탈억제형).
2019.05.22.
건강한 성인이라면 사회성의 뇌와 이성의 뇌가 발달되어 이성의 뇌 기능이 가장 커지고 상대적으로 생존의 뇌 기능이 작아진다.
2019.05.22.
애착손상이 거듭되면 트라우마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학대와 방치가 애착손상의 주요 원인이었다면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과잉양육’이 문제되기도 한다. 과잉양육이란 지나친 보호, 통제, 간섭, 교육 등으로 아이의 자율성 발달을 저해하는 과잉보살핌을 말한다. 앞에서 뇌는 ‘생존-사회성-이성’의 순으로 발달한다고 했다. 유아기 트라우마가 있으면 이러한 발달이 방해를 받아 상위 뇌보다는 하위
2019.05.22.
1단계 생존의 뇌(뇌간, 연수 등) 도망치기, 싸우기, 얼어붙음 2단계 사회성의 뇌(변연계) 보살핌과 어울림 3단계 이성의 뇌(전전두엽) 멈춤-선택
2019.05.22.
또한 우뇌는 좌뇌에 비해 주의력을 비롯해 사회적・정서적 신체정보의 지각과 전달에 많이 관여한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주의력과 함께 감각을 지각하고 이를 통해 감정을 파악하고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특히 두려움과 분노 등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1차 감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고 보고되고 있다.
2019.05.22.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애착손상을 받으면서도 그 대상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도망칠 수도, 계속 밀쳐낼 수도, 마냥 미워하지도 못할 대상 앞에서 아이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애정을 갈구한다. 이러한 혼란 상황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면 결국 아이는 꼭 필요한 지원 외에는 심리적 애착욕구를 포기하거나, 어떻게든 돌봄을 받기 위해 관계에 매달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에 이른다.
2019.05.22.
뇌의 발달은 자기조절 능력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뇌의 발달단계에 따라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역시 뇌를 세 부위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단계는 가장 원시적인 생존의 뇌의 스트레스 반응이다. 이는 약어로 ‘3F’라고 한다. 이 뇌는 세상을 ‘위험’과 ‘안전’이라는 두 축으로 나눠 바라본다. 중간은 없다. 위험을 느끼면 지극히 자동적이고 반사적으로 ‘도망치거나flight, 싸우거나fight, 얼어붙는freezing’ 것으로 반응한다. 이 반응이 활성화되면 충동과 행동을 조절하는 대뇌피질 반응이 억제되어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만 행동한다. 성숙한 인간조차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반사적으로 이렇게 행동한다. 예를 들어, 풀밭에서 뱀이 나타나거나 큰 개가 짖으면서 달려든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얼어붙는다’. 물론 일상에서 생명을 위협받을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의 스트레스 반응이 주로 이 단계에 머문다면(앞에서 이야기한 정삼각형 모양), 그 사람은 살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죄다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얼어붙는’ 반응으로 처리하려 든다. 예를 들어, 걸핏하면 화를 내는 상사가 있다고 치자. 보통 사람들은 상사가 화를 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말로라도 잘하겠다며 상사를 진정시키는데, 스트레스 반응이 ‘생존의 뇌’ 수준에 머문 이들은 얼어붙어서 그냥 멍해지거나, 아니면 핏대 높여 싸우고 만다.
2019.05.22.
또 다른 방식의 스트레스 반응이 있다. 3단계는 이성의 뇌에 기반을 두며, 이 단계의 스트레스 반응은 ‘멈춤-선택stop-choice’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살펴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고려해서 선택적으로 대응한다. 무턱대고 싸우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감정이나 각성을 조절하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생존율이 높지 않았던 원시시대일수록 3F 스트레스 반응체계가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생존의 위협까지는 아니지만 만성 스트레스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래서 1단계보다는 2, 3단계의 스트레스 반응이 무척 중요해졌다.
2019.05.22.
1단계 생존의 뇌(뇌간, 연수 등) 도망치기, 싸우기, 얼어붙음 2단계 사회성의 뇌(변연계) 보살핌과 어울림 3단계 이성의 뇌(전전두엽) 멈춤-선택
2019.05.22.
첫째, 자아가 대상과 단절되어 분리된다(과분화). 둘째, 자아가 대상으로부터 분화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공생관계에 머무른다(미분화).
2019.05.22.
첫째,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불안해하며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한다(억제형). 둘째, 반대로 거리 조절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다가가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한다(탈억제형).
2019.05.22.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농도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올라가면 애착과 관련된 대표적인 신경호르몬인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등의 분비가 감소된다.
2019.05.22.
결과 심리적 단절을 시도하고 타인과 연결하는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들에게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위로받으려고 하는 ‘보살핌과 어울림tend-and-befriend’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2019.05.22.
저항protest하다가 이어서 절망despair하고, 결국 분리detachment하는 과정을 겪는다. 부분 박탈이 미분화를 설명해준다면 완전한 박탈은 과분화를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2019.05.22.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렇게 된 것이 꼭 양육자 탓만은 아니다. 과분화 유형의 아이들은 고집스럽고, 공격적이고, 자율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 이들의 주된 감정은 ‘분노’다
2019.05.22.
성인이 되어서도 ‘냉담’ 또는 ‘대결’로 인간관계를 맺는다.
2019.05.22.
사람을 믿지 못하고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관계를 권력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보고 늘 우위에 서려고 애쓰는 것이다.
2019.05.22.
과분화 유형의 관계 맺기는 ‘냉담’ 아니면 ‘대결’이다. 이들의 사랑은 고스란히 자아로 향한다. 이는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라 자아몰두로 나타난다.
2019.05.22.
이렇게 자아가 과분화된 이들은 기질에 따라 ‘방어형’과 ‘지배형’으로 나뉜다. 방어형은 내향성이 강한 사람들로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피함으로써 지극히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관계를 맺고, 지배형은 공격적이면서 외향적인 성향이 높은 사람들로 상대를 굴복시켜서 관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2019.05.22.
어지간한 문제는 죄다 이기고 지는 것, 또는 누가 우위를 선점하느냐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하고, 맘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린다.
2019.05.22.
예를 들면 연민・미안함・자비심・부끄러움 등이 채 발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기성찰 능력과 정서적 공감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2019.05.22.
이들이 관계에서 많이 쓰는 심리적 방어기제는 ‘투사’다. 이들은 관계에 갈등이 생기면 이를 쌍방 간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가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특히 지배형의 경우에는 투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집요하게 상대를 설득하고 공격한다. 이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대의 감정을 조정하려 들고 자신의 문제를 상대의 책임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정조종자’들이다.
2019.05.22.
하지만 이들은 과분화 유형과 달리 과도한 불안 때문에 애착욕구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양육자에게 더욱더 매달린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양육자의 감정과 욕구를 살피고, 양육자와 연결되기 위해 양육자의 관심을 끌 만한 행동을 한다. 양육자가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양육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고 하는 역애착counter-attachment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분화 유형은 양육자의 감정, 사고, 욕구 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2019.05.22.
미분화 유형의 아이가 마치 과분화 유형의 아이처럼 혼자서도 잘 논다면, 그것은 ‘양육자는 내가(아이가) 혼자 노는 것을 바란다’고 여겨 불안을 참으면서 혼자 노는 것에 가깝다. 과분화 유형의 핵심 감정이 ‘분노’라면 이들의 핵심 감정은 ‘불안’이다. 이들에게도 애착욕구의 좌절에 따른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포에 압도되어 이들의 분노는 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 은폐된다. 이들은 결국 양육자와 연결을 위해 ‘순응’하거나 ‘헌신’한다.
2019.05.22.
이토록 철저하게 관계중심적인 이들이 원하는 것은 연결감을 넘어 일체감이다.
2019.05.22.
순응형은 상대와 하나가 되기 위해 수동적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맞춘다. 자신의 생각, 감정, 욕구 등을 외면하고 상대의 생각, 감정, 욕구를 살핀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보다는 상대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식이다
2019.05.22.
돌봄형은 적극적이다. 이들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애쓴다. 문제는 이들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가 실제로 원하는 것을 해주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자신이 주는 것을 상대가 그 자체로 좋아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2019.05.22.
이들의 자아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흐물거린다. 자신의 감정・생각・욕구 등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상대의 감정・생각・욕구에 쉽게 휩쓸린다. 이들 역시 상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과분화 유형이 상대와 너무 떨어져서 상대를 잘 볼 수 없다면, 이들은 상대와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상대를 잘 볼 수 없다. 이들은 늘 상대를 의식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정작 상대의 마음을 잘 읽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상대의 마음이라고 착각한다. 이들은 ‘하나됨’이 중요한 만큼 그 손상에 무척 예민하다
2019.05.22.
미분화 유형이 주로 쓰는 심리적 방어기제는 ‘내사introjection’다.
2019.05.22.
내사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외부 대상의 생각・감정・욕구 등을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 둘째, 투사와 정반대 개념으로, 갈등이 벌어지면 자기 탓을 하는 것. ‘자기 탓’은 무엇이 자신의 문제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자기반성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자기 탓은 늘 자기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책으로 끝난다. 내사란 쉽게 말해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갈등과 문제는 소화도 분해도 되지 않은 채 몸속에 쌓이거나 그대로 배출되어버린다. 미분화 유형은 바운더리가 흐릿하기 때문에 흔히 심리적 문제뿐 아니라 신체적 문제까지 동반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면서 내과 전문의인 게이버 메이트Gabor Mate는 저서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When the Body Says No》에서 바운더리가 미분화된 사람들의 신체적 문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미분화된 유형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만성질환 특히, 자가면역 질환에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2019.05.22.
자아의 분화에 따른 바운더리 유형과 그 특징 |
2019.05.22.
미분화 유형은 자아와 관계만 미분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감정과 사고 역시 미분화되어 있다. 이들은 감정적 사고를 많이 한다.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마치 아이 같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침대 밑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불안하다고 느꼈다면, 그럴 리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불안해서가 아니라 침대 밑에 귀신이 있다고 진짜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음의 안과 밖을 오갈 수 없고 마음 안에서만 머무른다.
2019.05.22.
반복적인 애착손상을 겪은 아이들에게는 기질에 따라 두 가지 역기능적 교류방식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억제형inhibited type’이다.
2019.05.22.
이들은 하나같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애착욕구를 포기하고 일관되게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피하는 이들도 있지만, 애착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애착손상이 남긴 두려움과 애착욕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2019.05.22.
두 번째는 ‘탈억제형disinhibited type’이다. 애착손상이 사람을 경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풀어버리는 쪽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조절하지 못하고 부적절하게 상대에게 다가가고 관여한다. 이 경우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상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아무에게나 다가가고 매달리고 애교를 부리는 등 관계에 걸맞지 않게 부적절한 친밀함을 드러내는 경우다. 간단히 말해 애정을 갈구하는 유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상대에게 자꾸 다가가 간섭하거나 괴롭히는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유형이다. 이런 차이는 무엇보다 아이의 기질에서 비롯된다. 애착손상과 아이의 기질이 더해져서 역기능적인 관계의 교류양식이 만들어진다.
2019.05.22.
유형은 자아와 관계만 미분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감정과 사
2019.05.22.
그런 데다 애착손상이 생기면서 그들의 불안과 과각성 상태가 조절되지 못할 정도로 증폭된 것이다. 그에 비해 탈억제형 아이들의 성향은 외향적이거나 공격적이다. 이들 역시 애착손상으로 인해 이미 지닌 성향이 더욱 증폭되어 거리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에 이들은 혼자 있으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관여하고 끼어들려고 한다.
2019.05.22.
탈억제형은 성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경계를 계속 침범하는 바운더리 크로서boundary-crosser가 되기 쉽고, 억제형은 성인이 되어 자기 경계를 방어하는 데 급급한 바운더리 가더boundary-guarder가 되기 쉽다. 바운더리 크로서들은 자꾸 상대에게 개입하여 무언가를 주거나 요구한다. 상대를 조종하려 하고 상대를 자기 뜻에 맞게 움직이고 싶어한다. 이에 비해 바운더리 가더는 내향적 또는 불안성향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다. 상대에게 먼저 다가서지 않고, 관계가 맺어지더라도 상대가 무언가를 먼저 해주기를 바라거나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2019.05.22.
앞에서 자아분화의 이상과 관계교류 방식의 이상에 따라 역기능적 관계의 틀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2019.05.22.
관계를 맺는 방식이 틀에 갇히면 계속 비슷한 관계 양상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2019.05.22.
바운더리 크로서는 상대의 동의 없이 그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바운더리 가더는 상대의 접근을 계속 경계한다.
2019.05.22.
첫째, 역기능적 관계틀은 어린 시절의 애착손상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아이-어른’의 관계방식이 교정되지 않은 채 ‘어른-어른’의 관계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인간관계는 마치 피터 팬처럼 성장을 멈추고 말았다. 둘째, 역기능적 관계틀은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아이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적응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성인의 관계에서 이 관계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많은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 셋째, 역기능적 관계틀은 고정된 게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인간관계에서 같은 어려움을 반복해서 겪고 있다고 해서 늘 이 네 유형 중에 하나의 유형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관계하느냐에 따라 역기능적 관계틀은 달라질 수 있다.
2019.05.22.
관계별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될 수 있고, 동시간대라고 하더라도 주된 유형 외에 부수적 유형이 얼마든지 함께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지배형이 주된 방식이지만 방어형이 부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넷째, 역기능적 관계틀은 바운더리가 건강해지면 건강해질수록 약화되어 순기능적인 관계틀로 회복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틀을 잘 이해하고 자각할 필요가 있다.
2019.05.22.
첫째, 이들은 ‘관계의 불편함’을 유독 못 견딘다. 이들은 관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갈등도 부담스러워한다.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자신이 양보하고 희생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 이들이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기피하는 이유는 갈등이나 불편함을 ‘파국’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거절은 ‘단절’이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상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싫어해서 거절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정훈은 ‘바쁘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내가 귀찮아서 전화를 안 받나?’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요청의 거절’과 ‘존재의 거절’을 구분하지 못한다. ‘거절 민감도rejection sensitivity’가 높아 작은 거절에도 심리적 고통을 심하게 느낀다.
2019.05.22.
둘째, 이들은 자존감이 무척 낮다. 사실 순응형뿐 아니라 나머지 세 유형 모두 자존감이 낮다. 이들 모두 존재 자체로 사랑받지 못한 애착손상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유형이 낮은 자존감을 인정하지 않고 방어한다면, 순응형은 과도한 불안으로 방어가 잘 되지 않는다. 이들은 늘 자신을 ‘나는 보잘것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거야’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부정적 자기평가를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상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상대에게 쉽게 동조한다. 그래서 정훈처럼 습관적으로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좋겠네요” “먼저 말씀하세요”라고 이야기하기 쉽다. 그 표현 속에는 나의 의견이나 감정보다는 당신의 의견이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들은 상대를 존중할 뿐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들은 뒤에 나오는 ‘지배형’과 정반대다.
2019.05.22.
이들은 ‘1인칭 사고’에 갇혀 있다. 이들이 거절을 잘 못하는 것은 관계의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서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거절을 당했을 때 상처를 받기 때문에 상대에게 거절하면 상대도 상처받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거절을 당하지 않는 이상, 일회성 거절을 두고 상대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절 또한 인간관계의 일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거절을 당하면 아쉽거나 실망스럽거나 기분이 상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관계에 금이 가거나 앙금이 남는 일은 아니다. 잠시 아쉽거나 불쾌할 뿐이지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2019.05.22.
이들은 대상항상성이 발달하지 못해 혼자 있는 능력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미약하다. 이들은 스스로 불안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양육자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핵심 정서가 불안이라면 이들이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은 순응이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상대에 맞춤으로써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에 안도감을 느낀다.
2019.05.22.
이들이 친절을 베풀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은 착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상황에서는 그나마 살아남는 길이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양육자의 생각이나 요구에 최대한 맞추는 것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눈치를 보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관계방식을 반복한다.
2019.05.22.
거절이나 자기 주장을 잘 못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기호, 취향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생각, 감정, 기호, 취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주변 인물의 것을 모방한 경우가 많다. 바운더리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2019.05.22.
순응형은 이렇게 상대의 취향이나 기호를 자동적으로 따라 하고, 상대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공유하면서 끊임없이 연결감과 하나됨을 넓혀가려고 한다. 이들은 기호나 취향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를 주관적 차이라고 보지 않고 상대의 기호나 취향이 더 우수하고 자신의 기호나 취향은 유치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기 쉽다. 이들의 모방은 상대가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2019.05.22.
순응형은 자아가 대상으로부터 미분화되어 관계에 몰두해 있지만, 관계의 교류는 억제형이라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어서 먼저 다가가지 못한다. 이는 결국 딜레마로 이어진다. 분리불안 때문에 혼자 있지 못하고 하나됨을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워지면서도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들은 고슴도치 딜레마를 보이기 쉽다. 멀어지면 불안해서 가까이 가려고 하고, 가까이 있으면 불안해서 멀어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그렇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존욕구와 소극성 때문에 결국 상대에게 순응하게 되고 점차 의존한다.
2019.05.22.
이들은 모든 관계에서 의존적 특성을 지니지만 특히 사랑을 하면 ‘어른-어른’이 아니라 ‘아이-어른’의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2019.05.22.
이들은 계속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를 찾는다. 이들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줄 마음보다는 상대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 연애한다. 그러고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일방적인 보살핌을 받고 의존하는 애착일 뿐이다.
2019.05.22.
사랑에는 열정과 함께 서로에 대한 우정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인 것이다. 안타깝지만 순응형은 아직 누군가를 사랑하고 돌보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다.
2019.05.22.
이들은 관계의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 분리불안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와 이견이나 갈등이 생기면 그 불안함의 고통 때문에 빠르게 화해를 시도한다
2019.05.22.
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사과가 아니라 문제를 덮어버리자는 회피다. 정작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 사과를 하면 상대는 당혹스럽거나 더 화가 나기 쉽다. 이러한 갈등해결 방식은 순간적인 불편함과 갈등은 비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를 점점 더 키운다. 이들의 자기억압적이고 자기희생적인 관계방식은 점점 더 큰 어려움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점점 자기를 잃어가고 점점 더 무기력해지며 스스로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된다.
2019.05.22.
누군가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못 견뎌한다. 2. 특별한 이유 없이 가까운 상대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떠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3. 자신의 실체를 알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4. 거절이나 부탁, 그리고 솔직한 자기표현을 하는 게 무척 어렵다. 5. 갈등이 생기면 일차적으로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다만 갈등을 빨리 해소하기 위해 성급하게 사과하거나 상대의 요구에 따른다. 6. 필요 이상 눈치를 보고, 상대의 기분이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다. 심지어 상대의 무례한 행동까지 이해하려다 보니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해 뒤늦게 후회한다. 7.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며, 함께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늘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8. 상대와 가까워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힘들어 갈팡질팡한다. 9. ‘싫어도 좋은 척’ ‘몰라도 아는 척’ 등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다. 종종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혼란스럽다. 10.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기대를 채우려고 애쓰느라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한다.
2019.05.22.
불안에 대한 순응형의 대처가 순응이라면, 불안에 대한 돌봄형의 대처는 한발 더 나아간다. 상대를 보살피는 것이
2019.05.22.
정신의학에서는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돌보는 왜곡된 관계를 ‘공동의존co-dependency’이라고 한다. 이런 관계는 얼핏 긍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남을 잘 돌본다는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문화에서 보면 권장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의존이란 서로 의지하고 돕는 건강한 상호의존이 아니라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양쪽 모두 힘들어지는 병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2019.05.22.
돌봄형은 상대가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도움 덕분에
돌봄형은 상대가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도움 덕분에 상대의 고통이 줄어들고 기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상대가 스스로 서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돕는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우면 도울수록 문제가 심각해지기 십상이다.
2019.05.22.
돌봄형이 과잉책임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감정의 뇌 위의 이성의 뇌가 잘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맥락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2019.05.22.
돌봄형에게는 주위에서 찬사가 쏟아진다. 상대에게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돌봄을 받는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라며 이해하지 못한다. 돌봄형의 보살핌이 한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속시키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돌봄형은 일방적인 보살핌을 베풀지만 이들 역시 의존적인 사람들이다. 돌보는 사람 역시 돌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돌봄형의 기쁨은 늘 타인의존적이다. 이들은 스스로 기쁨을 만들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2019.05.22.
겉으로 보이는 이타적 행동과 달리 이들의 내면에는 누군가를 돌봄으로써 칭찬받고자 하는 결핍된 아이가 있다. 이들의 바운더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 둘째, 다른 사람의 삶과 문제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는 과잉책임감, 셋째, 자신을 외면하고 상대를 돌보는 타인중심적 관계방식이다.
2019.05.22.
이들은 행복하고 유쾌한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불행한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은 늘 상처가 많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이루어진다. 이들은 그들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이나 삶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 역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조종이 노골적인 통제나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인 돌봄이라는 은밀한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상대는 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2019.05.22.
돌봄형은 자신에게 돌봄을 받는 사람의 바운더리 역시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돌봄형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은 관계가 지속될수록 건강한 책임감을 가진 주체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책임까지도 상대에게 떠넘기고 마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전락하기 쉽다. 돌봄형의 보살핌을 받는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장된 또 다른 통제임을 느낀다
2019.05.22.
사실 돌봄형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공동의존 관계는 대한민국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수많은 희생을 한다. 사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어쨌든 희생과 헌신이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면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2019.05.22.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자신과 연결지어 받아들인다. 2. 가까운 상대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고, 상대의 감정을 바꾸려고 애쓴다. 3. 문제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의 문제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느낀다. 심지어 가족보다 주변 사람의 문제에 더 신경 쓴다. 4. 혼자 희생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어떤 일을 도맡아 하거나, 부모가 아닌데도 누군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도우려고 한다. 5. 상대가 싫다는데도 반복적으로 뭔가를 베풀거나 조언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 6. 자기가치감과 만족감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도와야만 한다. 7. 상대에게 잘해주고도 좋은 말을 듣기보다 종종 핀잔을 듣거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8. 자신이 베푼 만큼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고, 의기소침해지며 신세를 한탄한다. 9.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잘 모른다. 설령 알더라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0. 자기 혼자서는 행복, 만족, 평화로움을 느낄 수 없다.
2019.05.22.
방어형 사람들은 관계에서 늘 선을 긋고 거리를 둔다. 이들의 핵심 문제는 ‘불신’이다. 이들은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에서 ‘친밀함’ 이전에 ‘위협감’을 느낀다. 이들의 내면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버림받아 고통을 느끼는 어린아이가 있다. 이 아이들이 고통에 대처하는 방식은 ‘차단’이다. 이들은 유년기부터 ‘관계의 고통’보다 ‘혼자 있는 외로움’이 덜 힘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2019.05.22.
스스로를 잘 돌보고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굳이 사랑이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그 결핍은 삶의 원동력이 되어 남들보다 한층 독립적이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2019.05.22.
이러한 심리적 방어를 가리켜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즉 금지된 행동 또는 힘든 마음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 반대의 행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적인 충동이 강한 사람이 무척 도덕적으로 행동하거나, 내면의 분노가 많은 사람이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여성적인 성향의 사람이 과도하게 근육을 키워 남성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2019.05.22.
애정결핍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사람이 오히려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이러한 반동형성에 의해 강화된 행동들은 흔히 강박적이고, 경직되고,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다.
2019.05.22.
이들이 보이는 ‘지나친 독립성’은 자기방어를 위한 갑옷 같은 것이다. 과거 어떤 시기와 상황에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런 갑옷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사라지면 공벌레는 다시 말린 몸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상처가 큰 이들일수록 갑옷을 벗지 못한다. 전쟁 때든 휴전 때든, 잠을 잘 때든 활동할 때든 늘 갑옷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갑옷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힘조차 발휘하지 못하게 구속하는 사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 안셀름 그륀Anselm Gruen은 《자기 자신 잘 대하기Gut Mit Sich Selbst Umgehen》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2019.05.22.
상처받은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오기를 부린다. 그러나 이는 인간을 점점 더 냉혹하고 공허하게 되도록 놔두는 절망감에서 나오는 반작용일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참된 관계를 맺을 줄 모르게 만들고 만다. 그래서 한 인격은 자신이 갈망하는 모든 사랑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2019.05.22.
1.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긴장을 내려놓지 못한다. 2.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 다가오면 안 좋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4. 집단 안에서도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있으려 하고, 도움받아도 될 일을 지나치게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한다. 5.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화는 잘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대화는 기피한다.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린다. 6. 냉담한 표정이나 가시 돋친 말로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7. 작은 도움이라도 받으면 빚진 느낌이 들어 빨리 갚아버려야 마음이 편하다. 8. 프라이버시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누군가 관심을 갖는 것에 필요 이상 예민하게 반응한다. 9. 자신의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10. 매우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를 보호하는 데 급급해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2019.05.22.
이들은 반복적인 애착손상으로 말미암아 누군가로 향해야 할 애착욕구가 고스란히 자기 자신을 향한다. 병적인 자기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만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이들은 ‘자기우월감’과 ‘특권의식’을 갖고, 스스로를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로 여긴다. 자신이 빠지면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고, 남들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19.05.22.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이 ‘잘못된 행동wrong behavior’에 대한 자기반성의 감정에 가깝다면 수치심은 ‘잘못된 존재wrong self’에 대한 자기혐오의 감정에 가깝다. 수치심은 죄의식보다 더 깊이 스며들어 나라는 사람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느낌으로써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감정이
2019.05.22.
문제는 지배형의 수치심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지배형의 수치심은 늘 분노 뒤에 가려진다
2019.05.22.
이들의 바운더리는 폐쇄적이다. 이들은 관계의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잘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를 원해서일 뿐, 그 사람 자체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상대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더라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모든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만 쏠려 있기에 이들은 심각한 ‘공감맹共感盲’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계속 자기 할 말만 생각한다. 물론 그조차도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자기 할 말만 하게 된다.
2019.05.22.
이들의 관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상대에게 끊임없는 인정과 찬사를 받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들의 일방적인 관계 맺기는 숱한 갈등과 대립을 초래하지만 점점 관계의 우위를 점해간다.
2019.05.27.
이들의 언어는 매우 직설적이고 판단적이고 지시적이다. 마치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듯, 부모가 아이 대하듯, 윗사람이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2019.05.27.
상대가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대화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들 앞에서 ‘내가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한 게 있잖아’와 같은 접근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이 늘 공격적이다. 이들은 공격적으로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데 아주 능하고 상대의 실수나 약점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너는 뭘 잘 몰라.” “넌 너무 우유부단해.” “넌 이기적이야.” “넌 어리숙해.” “왜 그렇게 예민해!” 그리고 상대를 개조시키려고 한다. 이들의 목표는 상대를 결국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2019.05.27.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상대방을 이기고 지배하는 데 집착할까? ‘우월감’이 이들의 정신적 주식主食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자존감이 중요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월감이다. 우월감이야말로 이들의 취약한 수치심에 대한 병적인 자기방어다.
2019.05.27.
문제는 바운더리가 희미하고 우유부단한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형이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바운더리가 희미한 이들은 이들의 당당함이 사실 ‘자존감’과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과 ‘특권의식’이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2019.05.27.
1. 어디서든 관심의 중심에 서기를 원하고, 사람들의 찬사를 바란다. 2. 승부욕이 지나쳐 늘 상대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질투심을 크게 느낀다. 3. 자신을 특별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4.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간다. 5. 갈등이 생기면 끝까지 밀어붙여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한다. 6. 이견이나 비판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흥분한다. 7. 기분이 상하면 가까운 상대를 업신여기고, 바보 취급 함으로써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8. 사람을 깊이 사귀지 못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는 사람 위주로 사귄다. 9.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10. 나이가 들어서도 비현실적인 성공, 갑작스러운 신분상승, 이상적인 사랑과 같은 공상에 몰두한다.
2019.05.27.
먼저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의 다섯 가지 특징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해보자.
2019.05.27.
첫째, 관계 조절 능력이 있다. 이들의 바운더리는 유연하다. 이들은 대상과 친밀도에 따라 그 깊이와 거리를 조율하며 관계를 맺는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되 합리적인 의심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더 깊이 교류하고 관계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2019.05.27.
둘째, 상호존중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기존중감뿐 아니라 타인을 존중하기에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이들이 자아중심성을 극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의 자아중심성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는 싫어할 수 있다는 것, 상대와 나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임을 알고 있다.
2019.05.27.
셋째, 이들은 상대의 마음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인지적으로, 실천적으로 공감할 줄 안다. 상대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위로와 친절을 베풀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삶을 책임지려 하거나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려할 줄 알고, 상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노력과 친절을 베푼다.
2019.05.27.
넷째, 이들은 갈등회복력이 높다. 이들은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갈등을 만들지 않고 좋은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냄으로써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이들은 갈등 상황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시 연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먼저 나서서 갈등을 풀려고 하며, 비교적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
2019.05.27.
다섯째,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바탕을 두고 표현한다. 단,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거친 솔직함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한 부드러운 솔직함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기 주장과 거절을 할 때는 정중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들은 단지 감정 표현에서만 솔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호・취향・관심사・욕구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만들며, 이를 통해 비슷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한다. 이들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인간관계에 필요 이상 매달리지 않으며, 혼자서 기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2019.05.27.
상대를 믿고 손을 내밀어야 할까? 아니면 배신의 위험성이 높으니 아무도 믿지 말고 혼자 살아가야 할까? 1980년대에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Robert Axelrod는 이를 실험으로 입증해보았다. 협력과 배신이 벌어지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해답을 찾는 컴퓨터 토너먼트를 제안해 각 분야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에게 참여를 독려했다. 그런데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수학 등 여러 분야의 쟁쟁한 게임이론 전문가들이 보내온 프로그램 중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맞대응전략Tit For Tat이라는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우선 협력으로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상대의 대응에 따라 맞대응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즉, 처음에는 먼저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상대가 도움만 받고 배신을 하면 상대하지 않고, 상대도 도움을 베풀면 다시 베푸는 것이다. 간단하지 않는가! 협력과 배신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맹목적인 이타주의자가 아니라 ‘분별 있는 이타주의자’가 가장 생존에 유리하다. 우리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바운더리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2019.05.27.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Eric Erikson의 말이다. 에릭슨은 한 인간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부정’을 제거한 ‘긍정’의 상태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긍정이라는 바탕 위에 부정이 놓여 있는 창의적 균형 상태라고 보았다
2019.05.27.
정신적인 건강함이란 ‘삶의 양면을 바라보고 이를 통합하는 능력’을 말한다.
2019.05.27.
그에 비해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삶의 양면, 관계의 양면을 바라볼 줄 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만,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과 의심을 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믿음은 의심의 반대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신앙이 아니며, 우리는 맹목적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
2019.05.27.
‘넌 대체 왜 이렇게 비판적이야!’라는 힐난은 비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부정적의 반대말은 ‘긍정적’이지만 비판적의 반대말은 ‘무비판적’ 또는 ‘맹목적’이다. ‘비판적’이라는 말은 어떤 주장이나 생각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분석하는 능동적 사고를 말한다
2019.05.27.
‘합리적 의심reasonable suspicion’이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 의구심을 말한다.
2019.05.27.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 바운더리가 희미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은 상대방의 생각・감정・주장을 그대로 흡수하고 말지만, 바운더리가 발달한 어른은 필터 기능이 있다.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걸러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다음 필요 없는 것을 다시 내보내는 ‘정신적 소화능력’이 있다.
2019.05.27.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사고는 인간관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도 믿음과 불신을 함께 갖고 자기비판적 사고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옳은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제대로 된 길인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짜 행복인지 따져 묻는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줄 알고, 자신의 오류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사고가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2019.05.27.
인지심리학에는 ‘도식schema’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은 아무 선입견 없이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전 경험을 거쳐 만들어진 ‘심리적 도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뇌의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특징 덕분이다. 쉽게 말해 뇌는 본능적으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또는 ‘위험한 것’과 ‘안전한 것’ 등으로 대상을 구분해 인지한다. 인간이 이런 도식을 활용하면 현실의 경험을 빠르게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으므로 생존력과 적응력이 높아진다
2019.05.27.
도식의 분화가 일어나지 못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 유형이 있다. 첫째는 도식의 고착固着이다. 이는 도식과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도식을 꿋꿋이 고수하는 것이다. 아이가 숨이 막힐 뻔했더라도 여전히 ‘동그란 것은 맛있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셈이다. 이러면 실수나 위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늘 같은 실수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반대 유형이 도식의 역전逆轉이다. 이 경우 이전에 가졌던 ‘동그란 것은 맛있어’라는 도식이 송두리째 부정되고 ‘동그란 것은 위험해!’라는 정반대의 도식이 생겨난다.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사탕이든 구슬이든 동그란 것이라면 모두 피하게 된다.
2019.05.27.
다시 말해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욕구의 좌절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좌절의 불가피성을 통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2019.05.27.
흔히 자아와 대상이 분리된 과분화 유형에게는 관계도식의 역전이 잘 발생하고, 자아와 대상이 나눠지지 않은 미분화 유형에게는 관계도식의 고착이 잘 나타난다.
2019.05.27.
그에 비해 미분화 유형은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반복하는데도 초기에 그 사람을 좋은 사람,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계속해서 그러한 도식 자체를 고수하기 십상이다. 반복해서 상처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상대는 좋은 사람이라든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2019.05.27.
바운더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일방적인 관계를 맺는다. 지배하고 순응하는 수직관계이거나 받기만 하거나 베풀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다. 그에 비해 건강한 관계는 수평적이면서 상호적이다. 이러한 수평적 관계 맺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상호존중하는 태도’다. 나를 존중하지만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 상대는 존중하지만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 그리고 나와 상대 모두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건강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2019.05.27.
“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2019.05.27.
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추해지고, 상대를 존중할수록 인간관계는 아름다워진다. 너무 당연한가? 그러나 진리와 황금률은 당연함 속에 있다.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면 된다. 단, 나도 존중하고 상대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라.
2019.05.27.
조화롭고 건강한 관계는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관계라는 의미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둘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관계는 갈등으로 얼룩지고 만다. 갈등이 커지는 이유는 서로의 차이가 커서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2019.05.27.
부동不同은 남이 나와 똑같아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나 역시 남과 똑같아지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 관계에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것의 핵심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의 생각, 감정, 취향, 욕구 등을 존중하는 것이다. 존중의 대상이 늘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국한된다면 건강한 존중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존중이다. 건강한 존중이란 존중의 대상에 상대와 함께 ‘나’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만 존중하는 태도와 함께 상대만 존중하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 역시 문제다. 나만 존중하고 남을 무시하다 보면 성격장애로 이어지고, 남만 존중하고 자신을 무시하다 보면 신경증과 다름없어진다. ‘난 이렇고, 넌 그렇구나’ 또는 ‘너도 중요하고 나도 중요해’ 같은 태도가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관계다.
2019.05.27.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자기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확대’된다
2019.05.27.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 사람 덕분에 새롭게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체험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관점을 획득하면서 우리 삶은 좀 더 다채로워진다. 그것이 바로 ‘우정으로서의 사랑’ ‘호혜적인 사랑’, 즉 필리아philia다.
2019.05.27.
기계적 대칭이란 모든 문제와 모든 영역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어 똑같이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의 성격이 다르고,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르기에 기계적인 대칭은 더 큰 파열음을 낼 수 있다.
2019.05.27.
어떤 부분은 한 사람이 좀 더 신경을 쓰고,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이 좀 더 신경을 쓰는 식으로 조율이 필요하다. 관계의 갈등은 비대칭성 못지않게 기계적 대칭성을 고집함으로써 만들어진다.
2019.05.27.
들었을 때
2019.05.27.
둘째, 인지적 공감이다. 이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을 하려면 무엇보다 ‘나’와 ‘상대’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상대는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독립적 인간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지적 공감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1인칭 관점에서 벗어나 2인칭 관점에 설 수 있을 때 인지적 공감이 가능하다. 인지적 공감은 보통 5세 이후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5세 남자아이가 자신은 생일선물로 레고를 받으면 가장 좋지만 아빠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이 레고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지적 공감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능력은 자아중심성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와 맞닿아 있다
2019.05.27.
첫째, 정서적 차원의 공감이다. 이를 ‘정서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한다. 정서전염은 가장 원시적인 공감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말투・자세 등을 자동으로 모방함으로써 상대의 고통이나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신생아실에서 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면 다른 아기도 따라서 우는 ‘신생아성 반응울음’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적 동물일수록 다른 사람의 고통, 감정, 행위에 자동으로 반응하고 모방하는 ‘거울뉴런mirror neur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에 전염되기 쉽다.
2019.05.27.
인간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착각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 또는 영장류의 공감능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감을 좀 더 세부적으로
2019.05.27.
우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받으면 이러한 거울뉴런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자신의 고통에 갇히게 된다.
2019.05.27.
과잉공감 역시 공감의 부족만큼이나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공감이란 단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고통을 잘 느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공감을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2019.05.27.
따라서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쉽게 속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오갈 수 있으며, 상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공감을 하되 과잉공감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입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2019.05.27.
인지적 공감능력을 흔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능력’, 즉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한다.
2019.05.27.
정서전염, 즉 정서적 공감은 뇌의 ‘거울신경망mirror neuron network’를 통해 일어나며, 이는 다른 동물들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인지적 공감의 신경망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2019.05.27.
말은 우리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상태에 초점을 두는 것을 뜻하며, 이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내적 경험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인지적 공감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 정신화 신경망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 서려고 할 때 활성화된다. 학자들은 우측하 두정부피질과 복내측 전전두엽피질, 그리고 측두엽과 두정엽이 만나는 ‘측두두정접합부Temporo Parietal junction’가 이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거울신경망이 타고난 것이라면 정신화 신경망은 발달의 과제인 셈이다.
2019.05.27.
바운더리가 건강하지 못한 네 가지 유형은 모두 정신화 신경망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1인칭 관점에 갇혀 있거나 정서전염에 머물러 있어 타인의 내적 경험을 이해할 능력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돌봄형은 정서적 공감은 매우 뛰어나지만 인지적 공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달리 성급한 위로, 과잉공감,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불필요한 도움을 주는 등 여러 문제를 보인다.
2019.05.27.
셋째, 행위적 차원의 공감이다. 이는 ‘공감적 돌봄empathic care’, 즉 ‘배려와 친절’을 말한다.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위로와 보살핌을 베풀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정서전염, 역지사지의 마음, 도덕과 교육,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등이 복합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굳이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 외에 행위적 공감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2019.05.27.
안정적 애착을 맺는 양육자들은 아이가 보내는 신호와 소통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의 심리적 반응이 어떤지를 자세히 살핀다. 유아는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기분이 어
2019.05.27.
건강한 공감을 위해서는 위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공감해야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되 자기와 상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상대의 고통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위로와 친절을 베푸는 실천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2019.05.27.
사람의 볼을 뾰족한 바늘로 찌르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준 다음 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MRI로 관찰했다. 그 결과 전대상회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상에 나온 인물이 자신과 같은 인종일수록 전대상회피질이 더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인은 동양인의 고통에, 백인은 백인의 고통에 더 강하게 반응했다.
2019.05.27.
‘공감의 원circle of empathy’은 제한이 있다. 우리는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거나 동질감을 느끼거나 ‘같은 편’이라고 생각할 때 공감한다.
2019.05.27.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한다. 샤덴프로이데는 인간의 높은 사회성의 어두운 그림자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깊은 연결감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편을 만들려고 한다. 단짝을 만들고 작은 무리를 지어 큰 집단 안에 내 편인 작은 집단을 만든다. 이를 ‘내집단in-group’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집단 안에 내집단이 만들어지면 그 성원이 아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외집단out-group’이 되어 결국 내집단 간의 대립을 초래한다. 내집단 성원끼리는 결속력과 공감을 느끼지만, 외집단에 대해서는 경쟁의식과 이질감을 느낀다. 인간은 어느 사회든 간에 ‘우리 집단we-group’이라고 하는 내집단과 ‘그들 집단they-group’라고도 부르는 외집단을 갖는다. 그리고 그 사회의 문화가 경쟁적일수록 ‘그들 집단’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끼고 기뻐한다. 인간의 높은 사회성은 협력과 대립을 동시에 발달시켜왔고, 인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높은 차원의 국제적 협력과 함께 인종청소와 같은 비극적인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2019.05.27.
그러나 자아가 미분화된 사람들은 나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역시 자아가 과분화된 사람들처럼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하기 때문이
2019.05.27.
그래서 상대가 “바쁠 텐데 괜찮아. 지금은 나 혼자 있고 싶어”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이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상대 옆에 자꾸 머무르려고 해서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
2019.05.27.
실제 공감과 돌봄이 위로가 되려면 상대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미분화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느낄 때, 자신의 방식으로 다가간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강한 정서적 전염은 아이러니하게도 ‘공감 실패’로 이어지고 만다.
2019.05.27.
‘같이’의 의미는 상대의 마음에 대한 관심, 반영, 그리고 공유다. 이것은 마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
2019.05.27.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가까운 관계에서 옳고 그름이나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더 초점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연결이 잠시 끊어지더라도 오래지 않아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2019.05.27.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은 공감과 비슷하지만 공감을 넘어선다. 공감이 상대의 감정과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라면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은 더 나아가 상대의 흥미, 욕구, 생각, 재능, 행복, 미래 등 마음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헤아리는 것이다.
2019.05.27.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싸움을 하지 않는 커플은 좋은 관계일까? 사실 갈등이나 싸움이 없다는 것은 그 관계가 친밀하지 않다는 의미다
2019.05.27.
첫째, 상대를 자꾸 바꾸려고 한다. 문제부부들은 권력에 집착한다. 이들은 부모 중에 한 사람이 권력을 일방적으로 독점해온 가정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한쪽 부모를 무의식적으로 모델링한다. 그들이 보아온 갈등해결이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순응하거나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력게임에 익숙해진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갈등을 생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 이들은 갈등이 일어나면 이를 더 깊은 관계로 이어가기 위해 해결하기보다는 순응해버리거나 상대를 굴복시킬 기회라고 여기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상대의 생각, 기호, 욕구, 취향 등을 존중해주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상대가 바뀌도록 집요하게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점이라면 상대에게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2019.05.27.
둘째,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생산적으로 풀어본 경험이 거의 없어 갈등이 생기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들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상호독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얼마 있지 않아 절망하고 분노한다. 결국 이들은 갈등을 풀기보다 참거나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아예 관계를 끊는 방식을 택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는 모든 것이 척척 맞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2019.05.27.
셋째, 상대가 문제가 있거나 부족한 사람임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이들은 갈등을 서로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지 않고 상대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2019.05.27.
물론, 분노나 미움의 감정은 어떤 부부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부부에게 분노나 미움은 사이가 나쁠 때 생겨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상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갈등이 풀리지 않은 채 반복되면 분노나 미움 역시 쌓여간다. 이는 단지 양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증오, 혐오, 경멸의 감정으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감정들은 응집력과 지속성이 강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상대와 함께 있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서로를 힘들게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시간을 거친다면 회복은 가능하다. 다만 들끓는 감정을 순화시키고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2019.05.27.
사람들이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회피, 설득, 공격, 차단, 순응, 타협, 상생 등 여러 가지가 있
2019.05.27.
회피는 갈등이 있다는 것조차 외면하는 것이고, 설득은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일 때까지 집요하게 이해시키려 하는 것이고, 공격은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차단은 갈등이 생기면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고, 순응은 갈등이나 마찰이 싫어 그냥 상대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고, 타협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절충하는 것을 말한다.
2019.05.27.
그렇다면 상생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함으로써 갈등을 풀고 공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오직 상생만이 갈등의 매듭을 푸는 방법이고, 나머지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2019.05.27.
이제 역기능적 관계유형들이 어떻게 갈등에 대처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미분화 유형을 보자. 순응형은 회피와 순응을 많이 사용한다.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이다. 그에 비해 돌봄형은 회피와 순응도 사용하지만 타협과 설득 역시 많이 사용한다. 상대에게 맞춰줄 때도 있지만 중요한 부분은 끊임없이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바꾸어 하나로 만들려고 타협하고 설득하고 하소연한다.
2019.05.27.
과분화 유형은 어떨까? 먼저 방어형은 차단을 많이 사용한다. 갈등이 생기면 ‘이 사람은 아니야!’라고 바로 정리에 들어간다. 갈등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지배형은 설득도 사용하지만 차단이나 공격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차단은 정말 관계를 끊기보다는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이들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든다.
2019.05.27.
그렇다면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어떻게 할까? 이들은 상생의 갈등해결 방식을 써서 갈등을 풀고 더 깊은 연결로 나아간 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갈등이 관계를 위협한다고 여기기보다 인간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풀어나간다. 갈등을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인성의 문제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서로의 차이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갈등을 누군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가치관과 취향, 대화방식의 차이로 인해 빚어지는 쌍방의 문제라고 본다.
인간관계라는 탑은 돌 아홉 개를 잘 쌓아도 마지막 한 개를 잘못 쌓으면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다. 쌓아올리기는 어렵지만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나 그 내구성은 관계에 따라 다르다. 어떤 관계는 유리처럼 한번 손상이 가면 와장창 깨지지만, 어떤 관계는 고무공처럼 얼마든지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관계의 회복력을 좌우하는 것은 꼬인 갈등을 풀어본 경험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마치 어느 정도 병치레를 해야만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활성화되어 면역력이 강화되는 것과 같다. 갈등이란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친밀함의 수업료’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갈등-회복break-repair’의 경험이다. 갈등을 풀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늘 승패를 가르려 들거나, 갈등을 피하기에 급급하다가 결국 관계 단절로 이어지고 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의 갈등을 회복하는 화해의 기술’이다.
2019.05.27.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대체로 갈등회복력이 우수하다. 이들은 갈등으로 관계가 손상되더라도 절망하거나 격분하지 않는다.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흥분된 마음을 다독거리고 난 뒤에 대화를 시도한다. 서로의 상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억울하거나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숙한 태도라고 여긴다.
2019.05.27.
미분화 유형은 사과부터 하거나 상대를 달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빨리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잘못했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불편한 마음을 빨리 털어버리고 싶어서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화부터 풀어” 하는 식이다. 사과가 아니라 ‘기분 풀어’에 방점이 찍혀 있다.
2019.05.27.
그에 비해 과분화 유형은 집요하게 사과를 받아내려고 하거나 지레 관계를 끊어버린다. 지배형이 전자라면 방어형은 후자다. 이들은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법이 없고, 심지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도 않는다. 먼저 말을 걸면 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하게는 진실하게 사과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배형의 경우는 관계의 복원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을 원한다. 상생이 아니라 지배를 원한다. 따라서 이들은 사과를 강요하면서도 그에 그치지 않는다. “미안하다면 다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등 이들은 상대에게 납작 엎드리라고 강요한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라며 시간을 거슬러 원상 복구시키라고 생떼를 쓰기도 한다.
2019.05.27.
그에 비해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작은 싸움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싸우고 난 뒤라도 각자의 역할이 잘 흐트러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싸우고 난 뒤에 그들만이 통하는 은밀한 화해의 제스처가 있다. 평소와는 달리 배우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온다거나 상대가 좋아할 만한 집안일을 하는 등 갈등을 풀어가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제스처는 별일 없었던 것처럼 덮고 넘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독거리고 차분히 대화를 하자는 의미다. 이들은 갈등을 서로의 입장 차이와 불분명한 의사소통 등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2019.05.27.
이들은 무엇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벌어졌는지를 좀 더 이야기하려 하고 들어보려고 한다. 이들이 갈등회복력이 높은 이유는 대화 가운데 ‘회복대화repair talk’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들은 싸우고 난 뒤에도 회복대화를 써서 감정을 추스르고 관계를 복원한다.
2019.05.27.
이러한 회복대화는 크게 네 종류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잘 잤어?” “뭐 좀 먹었어?”와 같은 상대의 안부를 묻는 언어다. 이들은 싸우고 난 뒤에도 상대의 안부를 묻는 짧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갈등을 풀 토대를 만든다. 회복의 토대가 만들어지면 상대의 마음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 “(마음이) 어때?” “(마음이) 괜찮아?” “아직도 속상해?”와 같이 상대의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어다. 상대의 지금 마음이 어떻고 왜 마음이 상했는지를 알고 싶다는 관심의 표현이다. 셋째, “그랬구나” “그랬겠네”와 같이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언어다. 상대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했고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이야기하면 이들은 그 마음을 알아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미안함을 느낀다면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넷째, “함께해. 부탁해. 노력할게” 등 실천을 표현하는 언어다. 속상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또는 두 사람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그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한다.
2019.05.27.
회복대화는 손상된 관계를 다시 복원하고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연결의 대화’다. 연결의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옥시토신처럼 관계를 이어주는 옥시토신 대화인 셈이다.
2019.05.27.
갈등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치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상대를 이기는 것보다, 누가 맞고 틀리느냐를 따지기보다 ‘연결’을 더 중시해야 한다. 갈등회복력이 높은 사람들은 ‘존이구동尊異求同’의 자세가 되어 있다. 존이구동이란 ‘서로 차이를 존중하되 공통점을 찾아 해결책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상생의 자세다
2019.05.27.
그에 비해 갈등회복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든 차이점만 보고 나쁜 점만 발견하려고 한
2019.05.27.
바운더리가 건강한 이들은 서로 견해가 다른 사안에 대해 필요 이상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렇지만 당신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며 상대성을 인정한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사실관계와 시시비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다. 상대와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려고 하고 들어주려고 한다. 이 역시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019.05.27.
● 갈등회복력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 ● 1.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 갈등을 일방적으로 상대의 인격 문제라기보다 어떤 관계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소통방식, 관점, 문화의 차이 등 쌍방적인 문제로 본다. 3. 갈등을 풀어냄으로써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4. 감정적으로 폭발하거나 서둘러 사과하거나 달래기보다 왜 갈등이 생겼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5. 시시비비나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서로의 감정과 좌절된 욕구에 주목한다. 6. 자신의 실수나 잘못일 경우 반성하고 구체적으로 사과할 줄 안다. 7. 상대에게 잘못을 시인하게 하거나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다. 8. 다툼 뒤에 ‘회복대화’를 이어감으로써 갈등을 풀려고 노력한다. 9.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를 표현할 줄 안다. 10. 갈등 상황에서도 상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2019.05.27.
건강한 바운더리를 세우는 것의 핵심은 방어가 아니라 표현이다. 바운더리는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적인 자기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감정,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잘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2019.05.27.
예를 들어, 순응형은 거절을 잘 못한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서 관계가 불편해진다면 어떨 것 같은가?’ ‘불편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럼 내가 불편한 만큼 상대도 나를 불편하게 여길 것 같은가?’ ‘그렇다고 하자. 상대도 불편함을 느낀다면 뭐가 걱정되는가? 상대가 나를 피하고 멀리할 것 같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 불편한 관계는 일시적인가? 계속 갈 것 같은가?’ ‘만일 내가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것만으로 상대가 계속 나를 싫어하고 피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상대와 관계가 불편해진다면 나는 솔직하게 말한 것을 후회하겠는가? 그럼 앞으로 계속 마음을 감추고 지내야 하는가?’
2019.05.27.
솔직한 자기표현에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하나같이 ‘타인민감성’이 높다. 이들은 애착손상과 불안성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내면을 향해야 할 안테나마저 모두 상대를 향해 있다. 상대의 기분을 포착하는 데 예민하다. 문제는 예민도는 높지만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의 기분 변화를 잘못 알아채는 경우가 많고,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부풀려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상대는 며칠 잠을 못 자서 얼굴이 굳어 있는데, 타인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표정이 안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상대가 말수가 없어 조용히 있는데, 자신을 싫어해서 침묵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2019.05.27.
미분화 유형은 자신의 마음과 외적 표현의 불일치에 자주 맞닥뜨린다. 좋은데 좋다는 말을 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싫은데 싫다고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심지어 싫은지 좋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의식의 안테나가 늘 바깥으로만 향해 있어 자신의 마음상태를 지각하는 것에 둔감하다. 이들은 관계나 조직 안에서 상대가 무슨 일을 부탁하면 거절을 잘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상대의 요청이나 부탁이 없는데도 상대가 원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상대에게 동조하거나 불필요하게 배려하는 것이다. 이를 ‘심리적 동조conformity 현상’이라고 한다. ‘동조同調’란 요청이나 지시가 없는데도 상대나 집단으로부터 암묵적인 압력을 느껴 상대와 집단의 기대대로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현상을 말한다.
2019.05.27.
그 결과 대체로 권위주의적일수록, 의존성이 높을수록,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자기비난을 하는 경향이 클수록 동조에 취약했다. 그에 비해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고 싶은 경향이 높고, 지능이 높으며, 자존감이 높을수록 동조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9.05.27.
동조현상은 사실 노골적인 압력이 아니라 암묵적인 압력을 느끼기 때문에 일어난다
2019.05.27.
사실 미분화 유형은 눈치를 많이 보지만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내지는 못한다. 타인민감성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동조현상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배려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상대의 마음 읽기에 자주 실패한다.
2019.05.27.
특히 순응형은 상대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는 과도한 심리적 동조현상을 낳는다.
2019.05.27.
이는 엄밀히 말해 아부와 다르다. 이해타산을 따지고 일어나는 반응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생각에 동조하게 되는 자동 반응이다. 나와 타인을 구분해주는 바운더리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2019.05.27.
돌봄형도 그렇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주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지나치게 배려하기 쉽다. 상대는 혼자 걷고 싶어 괜찮다는데도 집까지 바래다주거나, 자신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인데도 상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맛있는 척하며 억지로 먹는다. 이들은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헌신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왜 없겠는가! 이들은 자신의 배려와 노력에 대해 상대가 인정해주고 기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보지 않고 베푸는 일방적 배려는 암묵적인 강요가 되기 쉽다. 이들과 가까운 이들은 상대로부터 배려받고 존중받는 느낌보다는 부담, 불쾌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이 쌓이면 분노로 이어진다.
2019.05.27.
영어에는 솔직하다는 뜻의 단어가 여럿 있지만 frank와 honest가 대표적이다. 둘 다 ‘솔직한’이라는 형용사이지만 의미에 차이가 있다. frank는 때로는 남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거친 솔직함이다. 그에 비해 honest는 상대의 기분을 고려한 부드러운 솔직함이다. 물론 상대의 기분을 감안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라도 상대는 불편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주관성이며 공식이 통하지 않는 난해함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2019.05.27.
부드러운 솔직함은 거친 솔직함에 없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이성과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 감정과 이성이 분리되어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친 솔직함이지만, 감정이 이성을 만나면 표현이 부드러워진다. 이성은 연결을 중시하고 문제해결을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에 대한 판단이 중심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중심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옆 사람이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흥에 겨워 책상을 두드린다고 해보자. 당신은 매우 신경이 쓰이고 불쾌하다. 기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신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를 판단한 데 따른 거친 솔직함이다. 부드러운 솔직함은 “소리 때문에 공부가 잘 안 됩니다”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9.05.27.
셋째, 나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염두에 두고 표현하는 것이다. 거친 솔직함에는 1인칭만 존재하지만, 부드러운 솔직함에는 1인칭과 2인칭이 함께 있다.
2019.05.27.
미분화 유형의 문제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거나 인지하지 못할 만큼 솔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과분화 유형은 거친 솔직함이다.
2019.05.27.
과분화 유형은 감정과 이성이 분리되고, 상대를 자꾸 판단하며, 자신의 관점만 중요하게 여기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적 감정이 부족하고 꼭 필요한 눈치도 보지 않는다. 특히 지배형의 감정표현은 날것이고 자기 주장은 직설적이다. “난 네가 싫어!”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그럼 어쩌란 말이야!”처럼 이들은 자신의 표현에 대해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니까. 상대가 나를 화나게 했다고 느끼면 상대가 왜 그랬는지는 안중에 없이 상대에게 화를 퍼붓고 만다.
2019.05.27.
그랬는지는 안중에 없이 상대에게 화를 퍼붓고 만다.
2019.05.27.
방어형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타인이 접근하면 늘 과잉경계를 한다. 관심과 간섭을 구분하지 못하고 접근을 바운더리의 침입으로만 본다. 따라서 상대의 의도와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거칠게 자신의 불편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직장 동료가 점심시간에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라고 묻는다고 해보자. 큰 의미 없이 한 말이거나 그저 작은 관심을 표현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방어형은 이걸 바운더리의 침범으로 느끼고 자동으로 불쾌감이나 반감을 느낀다. “별일 없어요”라고 무성의하게 대답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심한 경우에는 “왜 그런 것을 물어보세요?” “알아서 뭐하려고요”라고 공격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경우에 상대는 ‘이게 저렇게 반응할 정도로 불편한 질문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과분화 유형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상대를 찌르는 창이 되기 쉽다. 이들의 자기표현은 투명한 유리창과 같아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2019.05.27.
과분화 유형의 솔직함은 frank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집단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자신이 소외될 수도 있다. 솔직할지 모르지만 거칠다. 그에 비해 honest는 지나치게 권위적인 사람이나 조직이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안전할뿐더러 때로는 호감을 준다. 문명화되고 사회화된 솔직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정중한 거절이나 잘 다듬어진 솔직한 자기표현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2019.05.27.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 자유가 있다. 좋은 관계란 내가 무언가 불편하거나 내키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이나 곤란함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다.
2019.05.27.
실제 밀접한 가족관계에서는 양육자의 생각, 감정, 신념 등을 자녀들이 그대로 공유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2019.05.27.
인간에게는 거울뉴런이 잘 배선되어 있어 가까운 사람의 생각, 감정, 행위 등을 자동적으로 모방하기 쉽기 때문이다.
2019.05.27.
이렇듯 어린아이들은 사랑하는 양육자의 감정, 생각, 욕구, 기대를 그대로 흡수한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2019.05.27.
최초의 욕망은 자아의 욕망이 아니라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이다.
2019.05.27.
가족치료 전문가 보웬은 이렇게 부부간의 갈등에 무의식적으로 자녀를 끌어들여 갈등이 다각화되는 현상에 ‘삼각화triangulation’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이들은 부부갈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쪽 부모의 ‘인질’이 되어 작은 배우자 역할에서 기쁨을 느끼고, 반대편 부모를 실제 이상으로 나쁘게 보고 증오하게 된다. 한쪽 부모와 공동운명체가 되어 부부간의 갈등과 상처가 아이들의 마음을 지배해버린 것이다
2019.05.27.
그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이후 그는 상담을 통해 자신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처의 역사성과 공동의존이라는 역기능적 관계패턴을 이해하고는 뒤늦게 자아분화의 과정을 밟아갔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구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과잉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차츰 자신의 감정과 내적 욕구를 알아갔고, 혼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찾을 수 있었다.
2019.05.27.
내게 반복되는 ‘관계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
2019.05.27.
첫째, 나의 지금 관계와 과거 관계를 연결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에게 끌릴까?’ ‘나는 이 사람과 왜 이렇게 인간관계를 맺을까?’ ‘왜 나는 비슷한 관계를 반복하고 있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고민이나 질문이 다를 수 있지만 혹시 나의 인간관계 전체를 놓고 볼 때 무언가 반복되는 패턴이 느껴지지는 않는가? 이를테면 이런 의문 같은 것이다. ‘나는 왜 상대가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데도 불쾌하다는 말을 하지 못할까?’ ‘나는 왜 누군가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밀쳐내려 할까?’ ‘나는 왜 상대가 부담스럽다는데도 뭔가 해줘야 마음이 편할까?’ ‘나는 왜 누군가 나와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까?’
2019.05.27.
우리는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느끼고,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행동패턴이 있다
2019.05.27.
최초의 관계는 하나의 ‘원형’이 되어 끊임없이 비슷한 관계를 찍어낸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틀을 애착이론가들은 ‘내적작동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이라고 한다. 같은 벽돌을 찍어내는 벽돌의 틀이 있는 것처럼 관계 역시 비슷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계의 틀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틀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사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
2019.05.27.
앞서 우리는 바운더리의 이상에 따른 네 가지 역기능적 관계의 틀을 알아보았다. 바로 ‘순응, 돌봄, 방어, 지배’다. 이 역기능적 관계의 틀은 모두 어린 시절 애착손상으로 인해 만들어져 전 생애 동안 반복된다. 어린 시절에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었지만 이 틀을 그대로 어른의 관계에 적용하면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에 비해 어린 시절에 애착손상이 컸지만 성인이 되어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바운더리를 수리하고 관계의 틀을 변화시킨 사람들이다.
2019.05.27.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관계패턴을 조금씩 가지고 관계를 맺는다. 또한 역기능적 관계패턴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배’형과 ‘지배’형이 만나면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순응-지배’의 관계 조합으로 탈바꿈된다. ‘순응-순응’형이 만나 ‘순응-돌봄’형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자아란 다층적이며, 관계에서는 언제나 역동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019.05.27.
우리는 자라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아동기에 애착대상과의 맺은 관계방식이 인간관계 모델의 원형이 되어 이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거절을 일삼고 냉담한 양육자 밑에서 자란 아이는 타인을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에 대해서도 좋은 느낌을 갖지 못한다. 양육자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양육자를 기쁘게 해줄 것인가 고민한 아이는 커서도 정서적으로 힘든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을 보기 위해 인간관계를 맺는다. 부모가 중병에 걸려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까 늘 두려웠던 아이는 커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갑작스럽게 떠날까 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 부모와 심한 전쟁을 벌였던 아이들은 커서도 자신의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를 굴복시키려 든다.
2019.05.27.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의 틀이 고정불변해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성찰함으로써 우리의 내적작동모델은 교정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관계의 틀을 변화시켜나갈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계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2019.05.27.
두 번째는 부모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2019.05.27.
세대들이란 상자들 안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상자들이다. 어머니의 폭력 안에서 당신은 할아버지의 폭력이 담겨 있는 또 다른 상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또 다른 상자(의심은 가지만 확실히 알지는 못하는) 안에서 당신은 뭔가 음험하고 은밀한 에너지를 지닌 상자를 발견할지 모른다. 사연과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_《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에서 재인용
2019.05.27.
우리의 소비방식, 대화방식, 연애방식, 놀이방식 등 삶을 살아가는 모든 모습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하는 생각, 우리가 느끼는 감정, 갈등에 대한 반응, 심지어 우리가 맺는 관계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일 수 있다. 쉽게 말해 습관이다. 그 패턴은 유아기에 만들어져 변화된 것들도 있지만 자라면서 점점 더 강화되고 굳어진 것들도 있다. 적응적인 것도 있지만, 부적응적인 것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관계 속에서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 패턴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2019.05.27.
일단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들여다보고 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특히 과분화 유형은 더욱 그렇다. 문제나 갈등의 원인을 늘 외부에서 찾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정하더라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올바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설사 나쁜 행동이나 관계방식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안에 익숙해져 있으면 묘한 편안함을 느끼고 이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상처의 대물림을 끊어내고 심리적으로 성장하려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반복되는 역기능적인 관계의 패턴을 자각해야 한다. 이 책에서 이를 다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하나 깊이 고민해보고 답변하기 바란다.
2019.05.27.
애착손상 치유 연습 ●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것은 단지 울타리를 낮추거나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구멍을 메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019.05.27.
그리고 청소년기나 성인기의 트라우마 역시 퇴행행동으로 이어져 바운더리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019.05.27.
애착손상을 ‘마음의 구멍’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느낌은 마음이라는 그릇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이들의 마음은 늘 허전하고, 그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잘 메워지지 않는다.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것은 단지 울타리를 낮추거나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구멍을 메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구멍은 매우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조금씩조금씩 메워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멍이 조금씩 메워질수록 우리는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
2019.05.27.
첫째, 자신에게 반복되는 문제를 자각해야 한다. 문제가 무엇이고 왜 생겨났고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둘째, 의식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자각은 변화의 시작일 뿐, 의식적인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셋째, 간절하고 절박하게 변화를 바라야 한다. 변화의 과정은 저항이 크고 시행착오의 연속이므로 이를 헤쳐나갈 힘이 있어야 한다. 특히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관계의 틀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은 더욱 그렇다.
2019.05.27.
원하는 게 클수록, 더 깊이 사랑할수록 당신은 변화하게 되어 있다
2019.05.27.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 남과 불편함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 솔직하게 나를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온다. 실패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것이 더 가치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2019.05.27.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큰 가치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던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편, 긴장, 갈등 등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불편을 감수할 용기가 있으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가? 그렇다. 그러나 명심할 게 있다. 노력을 하더라도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9.05.27.
이는 마치 가족 간의 인간관계 방식을 회사의 인간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집에서는 경우에 따라 자신의 일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지만, 회사에서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지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9.05.27.
그러나 유년기에 미해결된 문제를 많이 가진 채 성인이 된 이들은 이를 혼동한다. 서로 이해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려 하거나 떼를 써서 욕구를 관철시키려 들거나 토라져버리곤 한다. 또는 상대가 큰 소리를 내면 아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른-어른’의 관계에서 ‘아이-어른’의 관계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2019.05.27.
한 아이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독립의 과제가 있다. 우리는 독립이라고 하면 생활이나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 독립이다.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표현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고, ‘아이-어른’이 아니라 ‘어른-어른’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2019.05.27.
‘갈등적 독립conflictual independence’이라고 한다. 분리불안, 과잉책임감, 불신, 수치심 등의 갈등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척도다. 갈등적 독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고, ‘지금의 상대’는 ‘과거의 양육자’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모르는가!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잘 된다. 하지만 바운더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가 되면 이러한 구분이 무너진다.
2019.05.27.
‘어른-어른’의 관계에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게 되고, 결핍된 애착을 채우려고 하고, 원시적인 충동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므로 건강하지 못한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것은 ‘아이-어른’의 관계를 ‘어른-어른’의 관계로 바로잡는 일이다.
2019.05.27.
체념 뒤에 감추어져 있는 두려움 때문이다. 체념은 여러 번 하소연했는데도 달라지지 않았을 때 느끼는 마음이지만, 민주는 사실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2019.05.30.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뿐이다. 용기 있는 행동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지, 그 행동의 결과가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2019.05.30.
물건이 그런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일 수 있는 까닭은 사회적 고통을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거나 집단에서 배제되는 데 따른 고통은 여느 신체적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슬픔’ ‘애도’ ‘비탄’ ‘고립감’ ‘외로움’ 등은 단절과 상실에 따른 감정들이다.
2019.05.30.
나와 함께해왔고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에 우리는 친밀감을 느끼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은 친밀감을 넘어 정체성을 이룬다. 치유되지 않은 애착손상을 가진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만성적인 불안, 절망감, 울분, 슬픔, 무력감, 복수심 등의 바탕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유쾌한 감정이 아니지만 자기정체성의 핵을 이루는 가장 익숙한 감정들이다. 우리는 자기존중감을 흔히 ‘인지적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로 표현되다 보니 이를 생각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은 인지 이전에 감정의 문제다.
2019.05.30.
자기 내면의 바탕감정이 자기존중감의 핵을 이루는 것이다.
2019.05.30.
문제는 치유되지 못한 애착손상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처리할 수 없었던 고통스러웠던 감정들은 고스란히 마음에 응어리가 되어 자기정체성의 핵이 된다. 치유되지 못한 애착손상을 가진 이들에게 공포, 울분, 슬픔, 절망감, 수치심, 무력감, 복수심 등은 힘들면서도 너무나 익숙하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따뜻한 느낌과 유쾌한 감정에 강한 이질감을 느낀다. 당황해하고 불편해하며 때로는 이를 밀어낸다. 자기정체성과는 다른 이질적 감정이기에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19.05.30.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벗어나고 싶지 않는 딜레마에 놓인다. 익숙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마치 자신이 해체되거나 붕괴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강한 상실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핵심 감정에서 벗어나 좋은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 같고 마치 남의 옷을 입는 것 같은 불편함을 준다. 이들은 과거의 감정과 과거의 관계방식 안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머리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핵심 감정을 담고 있는 가슴은 강력히 저항하는 것이다
2019.05.30.
이들은 무엇보다 애착 트라우마를 반드시 치유해야 한다. 애착손상과 관련된 핵심 감정과 상처받은 채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자기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고서는 건강한 바운더리를 세울 수 없다. 반복된 애착손상으로 인한 응어리진 감정들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환경에서 재경험함으로써 그 감정에 엉겨붙어 있는 이미지, 감각, 생각들을 하나하나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손상이 자신의 발달과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애착 트라우마로 인해 분리된 신경계를 통합하고, 과각성된 스트레스 반응체계를 안정시켜야 한다. 또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와 통합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2019.05.30.
지면상 애착 트라우마 치유 과정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자기치유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자기위로’의 기능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 고통을 함께하려고 하고
2019.05.30.
아이들은 고통을 느끼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지만 성숙한 어른은 고통을 느낄 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능력, 즉 정서적 자율성을 갖고 있다. 정서적 자율성은 사실 건강한 아이에게도 있다. 앞에서 대상항상성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위안의 내재화’라고 했다. 대상항상성이 생기면 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잠시 동안 ‘괜찮아. 엄마는 내가 부르면 금방 달려올 거야’라며 스스로를 달랠 수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가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다.
2019.05.30.
진짜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돌볼 수 있다. 사람들은 단지 고통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빠진 자신을 위로하는 기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담실을 찾는다. 회피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많은 이들은 고통당하고 있는 자신에게 위로는커녕 비난을 퍼붓는다. 자기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자기혐오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과분화 유형이라면 그 고통을 다른 이에게 떠넘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고통을 위로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2019.05.30.
자기위로 훈련 방법은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에게 건네도 좋고,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에게 건네도 좋다.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지로 과거의 모습을 떠올린다.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 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 등 어떤 사실적인 장면일 수도 있고,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모습처럼 상징적인 이미지일 수 있다.
2019.05.30.
두 번째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다. 평소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자기친절의 문구를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다. 이왕이면 말만 건네기보다 몸과 접촉하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더 좋다. 이동할 때에는 한 손을 심장이 뛰는 가슴에 대고 하면 된다. 정지된 상태라면 양팔로 어깨를 감싸고 해주면 좋다. 문구를 직접 만들어서 해도 좋고, 아래 두 문장을 따라 해도 좋다.
2019.05.30.
‘내가 힘들 때조차 나에게 친절할 수 있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이왕이면 자신에게 위로가 될 문구를 직접 만들어보도록 하자. 다만 ‘~해야 해’와 같은 의무형 문장보다는 ‘~하기를!’과 같은 소망형 문장이 좋다.
2019.05.30.
바운더리를 세우는 자기표현 훈련 P.A.C.E. ● 자기표현의 핵심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담긴 욕구, 즉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
2019.05.30.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감정과 이성을 연결시키는 것, 둘째,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는 것, 셋째,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되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려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참 어렵다.
2019.05.30.
어떻게 해야 바운더리가 건강해질까? 바운더리를 건강하게 다시 세운다는 것은 ‘나도 존중하고 상대도 존중하는 상호존중의 태도’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 핵심은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감정과 이성을 연결시키는 것, 둘째,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는 것, 셋째,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되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려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참 어렵다
2019.05.30.
서양 심리학에서는 바운더리를 세우는 것을 ‘자기주장self-asser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2019.05.30.
그럼 득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고 돌볼 수 있다. 자기표현을 하면 불안과 긴장이 점점 줄어든다. 더 나아가 자기표현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 자존감이 높아야 자기표현을 잘하는 게 아니라, 자기표현을 잘하다 보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이다
2019.05.30.
이 책에서는 자기주장 대신에 자기표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구를 불안감이나 죄의식 없이 이야기하는 것 못지않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2019.05.30.
자기주장 훈련 전문가인 허버트 펜스터하임Herbert Fensterheim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자존감의 정도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놀라운 사실은 자기표현을 잘할수록 다른 사람들 또한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2019.05.30.
정말이다. 게다가 가장 좋은 점은 자기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표현은 단지 거절이나 부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근원적 욕구를 찾고 이를 표현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019.05.30.
자기표현 훈련은 여러 단계로 나누어 익히는 ‘분절分節학습’이 효과적이다. 마치 체조와 같다. 체조는 처음에는 여러 개의 동작으로 나누어 한 동작 한 동작 몸에 익히고, 이후에 연속동작을 익히는 것이 효과적인 훈련법이다. 나는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자기표현 훈련’을 위해 기계적이지만 ‘Pause멈춤-Awareness자각-Control조절-Expression표현’의 네 단계로 구분해보았다.
2019.05.30.
자기표현 훈련의 네 단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동적인 반응을 멈추고, 다음으로 감정과 욕구, 책임을 자각하고, 그다음으로 안팎의 상황을 파악하고, 마지막으로 솔직하지만 절제된 표현을 하는 것이다.
2019.05.30.
바운더리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관계양상이 그렇다. 이들은 인지의 뇌와 감정의 뇌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자동반응의 비율이 높다.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바운더리의 유형에 따라 자동반응 양상은 다르다.
2019.05.30.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반응이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내가 거절하면 상대는 틀림없이 상처받을 것이고, 내가 이렇게 해주면 상대의 기분이 좋아질 것이며, 상대가 다가와서 기분이 나빴다면 그것은 상대가 나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고,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다면 상대는 실제로 나를 무시한 사람이 된다. 자기가 느끼고 읽은 것이 사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2019.05.30.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작업은 이러한 자동적인 반응을 줄이고 의식적인 반응을 늘려나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동반응을 멈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STOP!’이다. 멈추고 관찰하는 것, 즉 ‘판단과 반응의 보류’가 필요하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느끼는 것이 사실인지, 상대는 나를 무시한 것인지 아닌지, 상대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등을 확인해봐야 한다. 대화 도중에 느닷없이 멈추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자동반응을 멈춘다는 것은 질문과 대화를 좀 더 나누는 것으로 이어진
2019.05.30.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잘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자신의 몸, 좀 더 정확히는 몸의 지각perception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감정은 마음으로 나타날 텐데, 왜 몸일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일차적으로 신체감각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체감각이란 외부세계를 느끼는 시각과 청각 같은 외부감각exterocepti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열감, 심장박동, 호흡, 어지러움, 통증, 근육의 경직감 등 몸을 느끼는 내부감각interoception을 가리킨다.
2019.05.30.
신체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다. 화가 났는데 신체적으로 아무 느낌이 없다면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 감정이 일어날 때에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몸의 감각이란 자아의 더듬이와 같으며, 자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 통로다.
2019.05.30.
그런데 바운더리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알람 기능에도 문제가 있다. 바운더리 센서가 너무 예민하거나 너무 둔감하다. 온도가 기준점을 넘어섰는데도 울리지 않거나, 기준점 근처에도 못 갔는데 마구 울려대는 고장난 화재경보기와 비슷하다. 순응형이나 돌봄형과 같은 미분화 유형은 바운더리의 센서가 둔감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참는 것도 잘하지만, 사실 자신이 힘들고 불편하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할 때도 많다.
2019.05.30.
자신의 바운더리가 존중받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침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알람은 불쾌감, 불안, 짜증, 언짢음, 분노 등의 감정들로 지각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분명 신체적인 감각을 통해 전달된다. 머리가 아프거나,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열감이 느껴지거나, 어깨가 굳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2019.05.30.
감정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작은 감정까지 예민하게 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잘 느끼는 것을 넘어 잘 알아야 한다.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지각perception이라면, 이 감정이 무엇이고 왜 느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자각awareness, 즉 알아차림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안다는 말은 몸으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과 감정의 만남이며 몸과 마음의 연결이다
2019.05.30.
첫째, 감정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감정조절에 도움이 된다.
2019.05.30.
감정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과의 연결을 활성화시켜 감정조절에 도움이 된다. 핵심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다
2019.05.30.
아주 간단하게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나는 지금 짜증이 나’ ‘나는 지금 불안해’ ‘나는 지금 우울해’라는 식으로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다. 익숙해지면 난이도를 높여 이름을 붙인 감정에 강도에 따라 점수를 준다. 가령 10점으로 수량화하여 강도를 표현해주는 것이다. ‘나는 지금 5점 정도 짜증이 나’ ‘나는 지금 3점 정도 불안해’라며 혼자말로 이야기한다.
2019.05.30.
이렇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 경험을 관찰하며 이름을 붙이면,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힘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자기조절력이다.
2019.05.30.
둘째, 감정을 정확히 알수록 욕구 또한 명료해진다. 감정에는 신호 기능이 있어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준다. 친구가 아무 연락 없이 집에 찾아와서 당혹스럽고 기분이 상했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명료하다
2019.05.30.
왜 화가 났는지를 생각해보면 감추어진 감정과 좌절된 욕구를 찾을 수 있다. 질투의 감정과 함께 무시당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애인과 헤어지는 것? 아니다. 아무리 친구라도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고, 더 중요하게는 자신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2019.05.30.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은 늘 감춰지기 쉽다. 감정에는 1차 감정과 2차 감정이 있다. 1차 감정을 받아들이기 힘들면 2차 감정은 1차 감정을 감추는 방어적인 감정이 된다. 분노는 본인도 모르게 어떤 감정을 감추는 2차 감정일 수 있다. 2차 감정은 자신의 욕구까지 왜곡시킨
2019.05.30.
자기표현의 핵심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담긴 욕구, 즉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다.
2019.05.30.
미분화 유형의 가장 큰 문제는 경계의 혼란이다. 이는 책임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들의 혼란은 책임의 ‘개인화personalization’라는 문제에서 온다. 관계에서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이들은 일차적으로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 어떤 교통사고에서도 한쪽의 과실이 100퍼센트인 경우는 없다. 모든 과실은 쌍방과실임에도 이들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 순응형이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는 쪽이라면, 돌봄형은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까지 상대 탓을 하는 과분화 유형들에게 미분화 유형은 천생연분일 수밖에 없다. 탓을 하면 하는 만큼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잉책임-무책임’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2019.05.30.
미분화 유형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감 있는 태도나 행동이 아니라 그 책임감이 과연 적절한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책임감은 적절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과분화 유형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문제가 일방적으로 상대 때문이라고 느끼고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물어야 한다. 관계의 문제를 늘 상대 탓으로 투사하는 자동반응을 멈추고 자신의 책임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2019.05.30.
조절의 첫 단계는 나의 상태나 상황에 따라 한계를 조절하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친구랑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은 한 시간도 안 되어 피곤해질 수 있다. 지난번에는 금전적 여유가 있어 애인에게 비싼 선물을 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나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2019.05.30.
이들은 늘 고정적인 역할에 갇혀 있고, 타인중심적인 인간관계를 한다.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아닌 이러한 관계는 결국 좋지 못한 결말을 맺을 수 있다.
2019.05.30.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한계는 내 상태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어야 한다.
2019.05.30.
첫째, 이 한계를 조절하는 주체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내 상태에 따라 한계를 조절할 수 없는 사이라면 친밀한 사이가 아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2019.05.30.
상대의 의도나 마음을 잘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지사지는 쉽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눈치를 보고 지레짐작하기보다는 ‘질문’일 수 있다. 상사가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기 이전에 먼저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순서다. 애인을 만났는데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해보자. ‘나한테 불만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이고 실제로는 물어보는 것이 좋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다만 이때 신경 쓸 부분이 있다. 상대가 “아니야! 별일 없어”라고 했을 때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같은 말이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각자 대화에서 맥락의 수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가 저맥락 대화, 즉 숨은 뜻 없이 솔직한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대로 이해하면 되지만, 만일 고맥락 대화를 많이 사용한다면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9.05.30.
조절의 세 번째 단계는 통합하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는 나도 중요하고 상대도 중요하고 관계도 중요하다.
2019.05.30.
상대가 한 번 연락하면 나도 한 번 연락하는 식은 곤란하다. 내가 한 걸음 갔으니까 너도 한 걸음 오라고 한 것은 기계적인 균형이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고 건강한 사이라면 내가 상대를 도우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나를 돕는다.
2019.05.30.
인간관계에서 자기표현의 핵심은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뒤에 있는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2019.05.30.
첫째는 상호주의적 표현이다.
2019.05.30.
미분화 유형은 오히려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까지 바꿔가며 상대와의 일체감을 느끼려 하는 반면에 과분화 유형은 상대의 취향이나 기호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2019.05.30.
그렇다면 상호주의에 입각한 표현은 무엇일까? “나는 맛있는데 너는 별로구나! 우리는 서로 입맛이 다르네”가 될 것이다
2019.05.30.
“난 이렇게 느끼는데(생각하는데) 넌 그렇게 느끼는구나(생각하는구나)!”라는 표현이 상호주의적 태도다.
2019.05.30.
둘째, 상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상황이나 마음에 대한 솔직함이
2019.05.30.
건강한 바운더리를 세우기 위한 자기표현은 되도록 비판단적일 필요가 있다. 비판단적이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이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9.05.30.
예를 들어, 남편이 다투고 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힘들다면 “당신 또 삐쳤구나!” “왜 그렇게 남자가 소심해!”와 같은 표현은 좋지 못하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나는 불편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라며 자신의 마음상태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고민이 있어 친구에게 만나자고 전화했는데 바쁘다고 다음에 보자고 한다. 당신이 실망했다면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 잠깐 나올 수도 있잖아”라는 표현보다 “잠깐이라도 볼 줄 알았는데 못 나온다니까 섭섭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낫다. 즉, 전자는 상대에 대한 평가가 들어간 표현이지만 후자는 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2019.05.30.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에는 대상과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가깝지 않은 관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는 신중해야 한다
2019.05.30.
가깝지 않은 업무 관계에서는 내 감정보다는 내 상황에 대한 솔직함이 필요하다.
2019.05.30.
즉, 일반적인 사회생활이라면 내 마음보다 내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한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때에도 너무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라는 할 일이 있고 이 일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식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대개는 “할 일이 있다”거나 “시간이 안 된다” 정도로 충분하다.
2019.05.30.
바운더리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한계 설정이나 한계 인식에 문제가 많다. 한계 자체가 없거나 너무 많고, 상대의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거나 반대로 자신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친한 사이라도 지켜야 할 거리가 있는데 이를 막무가내로 침범하거나 허용해버린다.
2019.05.30.
셋째,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9.05.30.
그러므로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높은 배려이며,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토대가 된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9.05.30.
표현해야 한다. 당신이 표현하지 않은 이상 상황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는 따른다. 많든 적든 관계가 불편해질 것이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야기할지 말지는 당신 몫이다. 다만 당신이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불편함은 당신이 염려하는 것보다는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일시적으로 불편해지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할 수 있는 문제다.
2019.05.30.
이때 상대를 통제하거나 바꾸는 데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상대에 대한 불만 토로가 중심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2019.05.30.
물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덜컥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시하거나 공격적으로 감정을 쏟아부을 수도 있다.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2019.05.30.
상대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9.05.30.
그것이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일일 테니까. 당신이 할 일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2019.05.30.
자기표현을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원칙 ● 1. 나는 누군가의 동의나 허락 없이 나의 생각, 감정, 욕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2. 상대 역시 나의 동의나 허락 없이 자신의 생각, 감정, 욕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3. 건강한 자기표현은 나와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이 상대의 권리를 무시하고 표현을 하면 공격적인 자기표현이고, 당신이 자신의 권리를 무시하고 표현을 하면 순응적인 자기표현이다. 4. 비언어적 표현과 언어적 표현을 일치시키도록 하자. 예를 들어 “싫어요”라고 하면서 웃거나 몸을 꼬아서는 안 된다. 만일 언어적 표현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비언어적으로라도 표현을 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마음이 상했다면 적어도 웃으면 안 된다. “그 말은 듣기가 거북한데요” “불쾌한데요”라고 이야기하면 좋다. 말을 하기 어렵다면 낯빛을 바꿔 잠시 바라볼 수도 있다. 5. 자기표현의 핵심은 나의 영역을 보호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초점이지 상대를 판단하거나 변화시키거나 더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19.05.30.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유연하지만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고, 허용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 ●
2019.05.30.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들은 거절 기능이 잘 작동한다. 어떤 요청이나 부탁을 받을 때 자신의 감정을 파악한 뒤 안팎 상황을 고려해 자신의 역량이나 한계 밖의 요청에는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한다
2019.05.30.
자신이 싫은 것을 싫다고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결정권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아주 많다.
2019.05.30.
‘나는 부탁할 수 있고 상대는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는 나에게 부탁할 수 있고 나는 상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다’라는 관점도 몸에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틀어쥐고 있다면 상대가 내 부탁을 들어주면 고맙고,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2019.05.30.
거절의 표현: 내가 거절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요청일 뿐
2019.05.30.
첫째, 시간 여유를 두고 결정하라. 의식적인 반응에는 ‘멈춤’이 필요하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들은 부탁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즉각적으로 부탁을 들어준다.
2019.05.30.
둘째, 정중하되 명료하게 거절하라. 정중한 거절의 핵심은 비판단적 표현이며, 나의 상황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2019.05.30.
판단이 들어가는 거절일수록 상대는 마음이 상하기 때문이다. 거절의 이유는 간단한 게 좋다. 굳이 상대가 묻지 않는데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2019.05.30.
셋째, 유연성을 발휘하라. 원칙적으로 상대의 부탁이나 요청을 거절할 권한은 당신에게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관계가 멀수록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쉽지만 가까운 사이에서는 좀 더 유연성을 가져보자
2019.05.30.
방어형은 어떨까? 이들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 너는 너’라는 구도로 인간관계를 맺기 때문에 사실 부탁을 받고 거절할 상황 자체가 많지 않다.
2019.05.30.
상대는 인간적인 호의를 갖고 도와주어도 이들은 거래관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무언가 베풀면 베푸는 대로 족족 갚아버리고 마는 이들을 볼 때 상대는 묘한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신뢰 회복과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9.05.30.
관계를 끊어야겠다면: 불쾌감을 차분히 표현하는 법
2019.05.30.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관계의 어려움은 악순환된다. 우리는 모든 관계를 좋은 관계로 만들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에게나 무례하거나, 일방적인 관계를 맺으려 들거나, 나와 너무 안 맞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2019.05.30.
인간관계의 초점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더 좋은 시간을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것이지,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관계를 좋게 하느라 끙끙대는 것은 아니다.
2019.05.30.
특히 상대가 계속 나를 무시하거나, 지배하려고 하거나, 일방적으로 이용하려고만 든다면 거리 조절이나 차단이 필요하다.
2019.05.30.
상대는 당신을 존중하지 않거나 당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019.05.30.
만일 그랬는데도 변화가 없다면 이 관계는 재고해봐야 한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를 평가할 때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새겨두자.
2019.05.30.
거리 조절과 차단을 시도할 때 초점은 상대를 바꾸고 공격하기보다는 ‘상대 때문에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다.
2019.05.30.
불쾌감을 차분히 표현한다는 것은 ‘감정을 조절해서 짤막하고 천천히, 명료하게 그 핵심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쾌감에 따른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불쾌감에 대한 의식적 반응이다.
2019.05.30.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겠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고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9.05.30.
물론 감정을 조절하며 차분히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다. 발표불안 치료에서는 불안으로 말이 빨라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천천히 말하는 훈련을 한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노력하면 점점 더 말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이러면 말의 속도만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조절할 힘이 생긴다.
2019.05.30.
내용을 어떻게 말할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도하면 점점 더 원하는 반응에 가까워진다. 문제는 그렇게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는데도 상대가 이를 무시할 때 생긴다. 이 관계는 가능한 차단하거나 정리해야 한다.
2019.05.30.
당신의 요청을 반복적으로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갈지 말지 당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신에게는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지 않을지에 대한 권리가 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잘 보호하는 일은 어렵지만 정말 필요한 일이다.
2019.05.30.
‘자기 세계’ 만들기 ●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은 ‘지금’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이 기뻐하는 행위를 알고 있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19.05.30.
건강한 바운더리의 핵심은 서로 협력하고 친밀함을 나누는 상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자기 세계’다.
2019.05.30.
자기로서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방어적일 필요도 없고, 필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다.
2019.05.30.
자기 세계란 자신의 내면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고 활동하는 주체로서의 삶의 영역을 말한다
2019.05.30.
원숙한 자기 세계는 단지 생활적인 독립을 넘어 자기철학과 정서적 자율성을 갖춘다.
2019.05.30.
정서적 자율성이란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알고, 스스로 기쁨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대상항상성을 갖춘 아이들이 엄마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호기심에 따라 자기만의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2019.05.30.
미분화 유형은 상대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라고 생각하기 쉽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자신도 싫어하기 쉽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감정과 욕구, 기대에 쉽게 동조한다. 특히 양육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순응형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까운 이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진정한 자기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2019.05.30.
과분화 유형은 어떻게 보면 자기 주장도 명료하고 자기 취향이나 욕구도 분명하게 보인다. 늘 당당하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은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좌절을 거듭 겪었던 상처가 있다. 함께하는 시간은 편안함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양육자와 분리되어 무분별한 탐색에 나선다. 이들은 단지 양육자에게서 벗어나 양육자 바람의 반대하는 방향으로 탐색하기 쉽다. 즉, 양육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싫어하고, 반대로 양육자가 싫어하는 것 같으면 오히려 관심을 갖는다. 반항 심리가 유년기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는 아이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 이들은 누군가의 기대와 욕구에서 벗어나 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고 살아가기에 무척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19.05.30.
상대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것과 상대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지 못하고, 자기 삶을 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2019.05.30.
그렇지만 그 발전의 동력은 내적 동기가 아니라 남을 이기려는 강한 경쟁심에 있다.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남들보다 더욱 멋진 자신의 세계를 쌓아올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것이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2019.05.30.
이들의 모든 에너지는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는데도 정작 자기 삶에 자기가 없다는 허무감에 휩싸인다.
2019.05.30.
건강한 자기 세계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
2019.05.30.
그렇다면 건강한 자기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2019.05.30.
첫째,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은 주체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책임질 줄 알고, 그 경험에서 무엇 하나라도 배우려고 한다.
2019.05.30.
내가 나의 선택과 행위를 결정하는 것, 싫은 것을 싫다고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
2019.05.30.
자기결정권이 없는 자기 세계란 씨 없는 과일이다. 그렇다고 독불장군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의견을 듣고 조언을 구하되 최종적인 결정은 스스로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2019.05.30.
둘째, 자기이해에서 생겨난 개성을 갖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면 자기 세계를 세울 수 없다. 자기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생각처럼 이야기함으로써 자기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2019.05.30.
그렇다면 자기이해라는 대체 무엇을 가리킬까? ‘나답게’ 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다양한 영역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구, 재능, 가치 세 가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기비판적 사고다. ‘욕구’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재능’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가치’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2019.05.30.
재능은 상대적으로 변동성이 적지만 욕구와 가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인정과 성취가 중요했지만 나이 들면 행복과 관계가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05.30.
자기이해는 삶을 살아가면서 거듭되는 과정이다. ‘나’라고 여겼던 것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나’가 생겨나고,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또 허물어지고 또다시 만들어지는 연쇄적 변화를 거치는 것이다.
2019.05.30.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다양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환경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관계와 경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그래서 자기이해에는 ‘자기비판적 사고’가 꼭 필요하다.
2019.05.30.
‘이것이 나’라는 틀 안에 갇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생각인가?’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것이 내가 잘하는 것인가?’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가?’라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사색해야 한다.
2019.05.30.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갈수록 바운더리가 건강해진다. 자기이해가 깊어지면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 취향, 기호, 가치관, 사상 등이 형성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게 되면서 ‘나 아닌 것’에 매달리기보다 ‘나’인 것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2019.05.30.
나이 들면서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은 더 이상 ‘나 아닌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 집중하면 굳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자기 자신의 색깔을 갖게 된다
2019.05.30.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다움을 심화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2019.05.30.
셋째, ‘관심사’를 통해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자기 세계는 이동성이 있다. 밖으로 더 확장하려 하고 안으로 더 깊어진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안팎으로 움직인다. 움직임에는 방향이 있게 마련이고, 그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관심사다.
2019.05.30.
아이의 첫 탐색은 무질서해 보일 수 있다. 이것저것 손닿는 대로 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을 찾아가고 놀이를 만들어간다. 관심사가 생기면서 아이의 활동은 방향성이 생긴다. 어른의 삶도 다르지 않다.
2019.05.30.
그러나 자기이해가 뒤따르면 사소한 관심과 중요한 관심, 내면에 기반을 둔 관심사와 외부에서 기인한 관심사를 구분하고 자신의 삶에서 핵심 관심사를 찾게 된다. 이렇게 ‘제1의 관심사’를 찾게 되면 삶의 방향은 저절로 만들어지고, 자기 세계는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물론 제1의 관심사가 평생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
2019.05.30.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힘, 나의 ‘오티움’은 무엇인가?
2019.05.30.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은 ‘지금’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이 기뻐하는 행위를 알고 있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05.30.
이들은 행복을 무한정 미루지 않는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서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계 안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2019.05.30.
그러나 불행한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스스로 기쁨을 지어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2019.05.30.
지금의 경험을 좋게 생각하려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좋은 경험을 하라는 것을 말한다.
2019.05.30.
그렇다면 좋은 경험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행위의 보상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걸 라틴어로 ‘오티움Otium’이라고 한다. 오티움은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인 여가’를 뜻한다. 즉, 좋은 여가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이 아니라 내 영혼이 기뻐하는 경험의 시간이다
2019.05.30.
오티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에게는 동식물을 키우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바이크를 타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요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공부일 수도 있다
2019.05.30.
공통점이 있다면 활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어떤 활동을 하는데 결과가 좋아야만 기쁘다면 그것은 오티움이 아니다.
2019.05.30.
오티움을 만나면 우리는 삶의 고통이나 권태, 불행을 겪었을 때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일이 너무 고달프거나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오티움 활동은 더 스트레스가 될까? 아니면 고달픈 삶의 위안이 될까? 후자다. 오티움은 그 활동 자체로 즐거움을 주니까. 오티움은 어른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2019.05.30.
오티움은 내일이 아닌 오늘의 행복이며, 물거품 같은 쾌락이 아니라 기쁨과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진정한 행복이다.
2019.05.30.
영혼의 기쁨을 주는 오티움은 점점 깊어진다. 오티움이 깊어지면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게 되어 주위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그 관심사로 인해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가 깊어진다. 그것은 억지 노력이 아니라 오티움 활동이 주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2019.05.30.
관계를 위한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때,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공통의 경험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자기 세계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걸어나갈 때 우리는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맞춰갈 수 있다.
2019.05.30.
지혜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2019.05.30.
건강한 바운더리는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곳에 존재하고 역설적인 모순을 통합하면서 기능한다. 즉, ‘독립적이면서도 친밀하고’ ‘솔직하면서도 정중하고’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고’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인’ 상태를 말한다.
2019.05.30.
바운더리가 뚜렷하다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이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2019.05.30.
즉, ‘내 것’ ‘내 자식’ ‘내 삶’ 등 내 것이 분명해진다
2019.05.30.
상호교류를 통한 연결감이 점점 확장되면 어느 순간부터 바운더리가 다시 희미해진다. ‘나’의 개념이 약해지고 ‘우리’로 확장된다. ‘우리 것’ ‘우리 아이들’ ‘우리 삶’으로 넓혀진다. ‘나’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고 자신을 개별적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연결된 존재로 느끼게 된다.
2019.05.30.
인간의 성장은 나선식이다. 바운더리가 다시 약해지는 것은 ‘미숙한 희미함’으로 내려감이 아니라 ‘성숙한 희미함’으로 올라섬이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며, 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실천하게 된다. 자신을 채움과 동시에 공동체에 공헌하는 것이다. 자아가 발달하면 어느 순간 자아는 스스로를 넘어선다. 고로, 빵이 되려는 밀은 먼저 잘 익어야 한다.◆
2019.05.30.
자신을 채찍질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뒤로 미루려 하더라도, 자신감이 생기는 상황은 대체로 오지 않습니다. 무리해서 노력하거나 한층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한들 자신감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의 출발점이 ‘나는 아직 멀었다’,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부정적인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자신을 좌절시킨 부정적인 선입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고, 언제까지고 자신감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019.07.09.
10년가량을 넘겼을 때야 겨우 두각을 나타냅니다. 어떤 분야든지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 것이지요.
2019.07.09.
해본다. ② 경험을 쌓는다. ③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게 된다. ④ 주위에서 인정하게 된다. ⑤ 어떻게 해야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2019.07.09.
어떤 사람은 ①의 ‘해본다’는 것부터가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야말로 ‘어렵다는 것은 망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세요. ‘실패할지도 모른다’,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 ‘나 같은 건 아직 멀었다’고 하는 망설임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이 생긴다면 그 또한 망상입니다.
2019.07.09.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됩니다. 일하는 방식을 모르겠다면 “이 일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될 일입니다. 가르침을 받았다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입니다. 민폐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라고 솔직하게 사과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처음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보세요. 이런 태도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는 어떤 업무나 분야에서든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법입니다.
2019.07.09.
만약 매도하는 자에게 매도를,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를, 언쟁하려는 자에게 언쟁을 되돌려준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식사를 받아들이고 같은 것을 먹은 셈이 된다. 나는 그대가 내어준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제 그대의 말은 그대만의 것이다. 그대로 들고 돌아가도록 하라.
2019.07.09.
이런 붓다의 합리적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는 이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승리란, 상대방에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반응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2019.07.09.
“바라문이여, 그대가 집에서 대접한 요리를 손님이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질문을 받은 이상 바라문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내 것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그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직접 먹어야지”라고 바라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019.07.09.
바로 상대방의 반응은 상대방에게 맡긴다는 사고법입니다.
2019.07.09.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는 항상 ‘만’과 ‘만’의 부딪침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이 있지요. 그 생각을 밀어붙여 ‘내가 옳다’고 확인하려는 것이 바로 언쟁하는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2019.07.09.
우선 ‘옳음’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옳다는 판단이 그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알겠어?’라고 억지로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옳은 것이군요’라고 그저 이해할 뿐입니다.
2019.07.09.
애초에 사람은 각각 다른 ‘뇌’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고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내심 기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기대나 선입견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2019.07.09.
‘상대방과 나의 반응을 구별해서 생각한다’, ‘상대방의 반응은 상대방에게 맡긴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로 고민하지 않기 위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2019.07.09.
이때 뒤쪽을 향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지는 않은지, 긴장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망상이 솟아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것이지요.
2019.07.09.
‘반응하기 전에 잠시 이해하라’는 태도를 관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9.07.09.
다만 만일 이쪽에서 상대방과 똑같은 반응을 돌려주면 상대방의 반응에 응수하는 셈이 됩니다. 이때 상대방에게 지지 않는 것이나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019.07.09.
들여다보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연습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상대방과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마음의 반쪽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나머지 반쪽은 내 마음 안쪽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 사용해보세요. 그리고 이를 상대방을 마주하는 방식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좋겠습니다.
2019.07.09.
‘관계 방식’이란 어떤 마음을 상대방에게 향하게 할 것인지를 뜻합니다. 앞서 말한 사고법을 실천하면,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을 향하게 할지를 확립함으로써 인간관계에 시달리지 않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2019.07.09.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다
2019.07.09.
왜냐하면 판단은 항상 자신의 인정욕구, 즉 ‘만’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019.07.09.
나는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에 대한 집착을 그저 집착이라고 이해하고, 타인이 범한 과오를 과오라 이해하며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을 주시하며 마음의 평안과 청정을 지킨다.
2019.07.09.
과
2019.07.09.
하지만 그 상황이 끝나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답답하며, 개운치 않고 짜증이 난다면 그 원인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기억입니다
2019.07.09.
싫은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그 기억에 대한 내 반응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상대방과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을 때는 ‘이것은 단지 기억이다’, ‘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지 상대방은 관계없다’고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해봅시다.
2019.07.09.
상대방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도 마음도 무상, 즉 변해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2019.07.09.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시시각각 계속 변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서로 시시각각 계속 변하는 마음으로 인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이해했다면 이제 내가 마주하는 상대방은 항상 새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2019.07.09.
이런 때야말로 마음의 반쪽을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다른 반쪽은 내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반응하려는 마음에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
2019.07.09.
하지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점은 자신이 생각하는 ‘인내’가 정확하게는 상대방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
2019.07.09.
자신의 뜻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상대방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2019.07.09.
전반적으로 ‘쾌인가 불쾌인가’라는 반응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2019.07.09.
생물은 욕구가 채워졌을 때 쾌를 느낍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욕구를 부정하지 않고 채워주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입니다.
2019.07.09.
붓다의 사고법에서는 불쾌의 상태인 괴로움을 느끼게 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늘 사람의 인생은 욕구에 사로잡혀 불쾌를 느끼는 모습과 쾌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뉩니다.
2019.07.09.
다시 말해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이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인정욕구입니다.
2019.07.09.
문제는 인정욕구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상태로 변질된다는 데 있습니다. 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② 그 욕구에 반응해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 망상한다.
2019.07.09.
망상이 넘치면 선입견이 됩니다
2019.07.09.
어떤 생각이든 망상에 불과하다고 확실히 자각하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망상이라는 뇌의 불순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2019.07.09.
망상에 대처하기 위해 몇 가지 알아둬야 할 방법
2019.07.09.
우선 망상에는 끝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2019.07.09.
더구나 각각의 기억은 복합적으로 결합하기 때문에 여태껏 본 적 없는 망상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의 분노나 우울, 의심 등의 정신 상태가 작용해서 본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선입견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9.07.09.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사람은 망상을 그만두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망상하는 버릇 자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고민의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2019.07.09.
이 사람의 스트레스는 일이나 인간관계가 원인이 아닙니다. 사실은 마음속에 항상 떠도는 어머니의 환영, 즉 어머니에게 간섭을 당했던 기억과 분노의 감정이 줄곧 그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2019.07.09.
‘연기론緣起論
2019.07.09.
애초에 마음은 항상 방황하고 채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성질을 처음으로 간파한 사람은 붓다였습니다.
2019.07.09.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보는 것은 불타고 있다. 보는 마음은 불타고 있다. 탐욕이라는 불꽃이, 분노라는 불꽃이, 망상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마음에는 고뇌, 쇠약, 상실, 근심과 슬픔, 아픔과 번민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2019.07.09.
반응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 삼독 등 나쁜 반응을 정화해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 • 사람들과 인생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모
2019.07.09.
사람에게는 본래 욕심과 분노와 망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이런 인간의 번뇌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이용함으로써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서 해답을 구한들 결국은 욕심과 분노와 망
2019.07.09.
그럴 때일수록 잠시 동안 눈을 감아봅시다. 호흡을 느끼고 어둠을 주시하기 바랍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입니다.
2019.07.09.
느낍니다. ‘살아 있는 온갖 것이여, 행복해져라’라고 슬픔의 마음을 향해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몇 번이고 안식처로 돌아가봅니다. 나도 모르게 바깥
2019.07.09.
사람은 뭔가를 바라며 살아간다. 하지만 바라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지 않은가. 즉, 잘못된 것을 바라는 것과 올바른 것을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라는 것은 늙음과 병과 죽음이라는 ‘상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생겨난다. 누구라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올바른 것을 바란다는 것은 이런 잘못을 알아차리고 상실을 초월하여 인간적인 고뇌에서 떨어진 삶의 태도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잘못된 것을 바라며 살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2019.07.10.
올바른 사고 중 하나는 방향성을 본다는 사고법입니다.
2019.07.10.
이는 세속적인 가치를 손에 넣는 것을 방향성으로 삼은 삶의 태도입니다.
2019.07.10.
나는 늙어가는 마음을 늙음이 없는 마음으로 바꾸리라. 고뇌하는 마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평온함으로 최고의 납득으로 바꿔 가리라.
2019.07.10.
사람은 항상 뭔가를 좇습니다. 바라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하고, 손 안에 들어온 것을 잃어버리는 현실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을 살면서도 현실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뇌를 초월한 납득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반드시 다다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2019.07.10.
코멘트
세상의 모든 시작은 다른 시작의 끝에서 온다. _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철학자)
2024.02.25.
뇌는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운동이 그 상태를 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저 무기력하게 뇌의 작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변화시켜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이것은 마음의 문제다.
2024.02.25.
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상적인 상태, 즉 항상성을 유지함으로써 몸을 지키고자 분투한다. 동시에 안락함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뇌가 생각하는 ‘항상성이 유지되는 행복한 상태’가 무려 100만 년도 전의 환경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2024.02.25.
우리 뇌에서 가장 원시적인 영역인 시상하부•는 여전히 원시시대에 머문 채 움직임이 많아지면 허기의 알람을 사정없이 울리는 것이다.
2024.02.25.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핵심기관으로, 자율신경계와 호르몬 분비 등을 조절한다. 이를 통해 대사의 조절, 체온과 하루 주기의 리듬 유지, 갈증, 굶주림, 피로의 조절 등 기초적인 신체 대사를 유지한다.